역사를 아로새기는 고통

 

 

교수님의 소개로 작가 조정래의오 하느님이라는 작은 책을 교내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쌓인 눈이 조금씩 녹아가던 변두리의 저녁, 나는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숨겨진 역사의 이야기에 내 좁은 가슴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참말로 소설다운 소설이었다. 나는 보통, 소설은 이야기 전개의 필연성이 드러나야 한다고 여겼다. 물론 이 소설에서 필연성을 발견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정말 우연과 같다고 느낄 정도로 기가 막힌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 내용이 단지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노르망디 해전에 독일군복을 입은 조선인이 참전했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강자의 뜻대로 굴러가는 것이 사회이고, 강자에 의해 기록되어지는 것이 역사이기 때문에 약소국 조선의 힘없는 백성은 그가 왜 그 허허벌판에서 총을 들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제2차 세계대전, 그 한가운데에 서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작중인물들에 대한 고달픔과 서러움을 느껴 몇 번이고 가슴으로 울었다고 말했다. 약육강식의 논리는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나보다.

나는 몇 년 전에 반년 동안 스리랑카에서 자원 봉사 활동을 했다. 그 곳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스리랑카의 부조리한 사회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스리랑카는 현재 다수의 싱할라족과 소수의 타밀족이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다. 여러 사회 부분에서 싱할라족은 타밀족을 차별한다. 종교, 언어, 문화가 다른 타밀족은 독립을 원하고 있지만, 스리랑카 정부는 절대 불허방침을 분명히 하며 그들을 무력으로 탄압한다. 타밀족은 타밀 군을 조직하여 싱할라족과 전쟁을 했고, 수도 콜롬보에서는 테러를 자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득을 얻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싱할라족은 이득을 얻었을까? 물론 아니다. 스리랑카 정부는 지금의 전시 상황을 자기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명분으로 삼고 있다. 스리랑카의 경제발전은 뒷전이고, 국민들의 민주화는 갈수록 후퇴한다. 굶주리는 싱할라족, 학교에 가지 못하는 싱할라족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타밀족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이득을 본 것은 권력 유지에 눈이 먼 소수의 지배층뿐이었다. 전쟁과 테러로 억울하게 죽어 간 영혼들의 넋을 그 누가 위로한단 말인가?

스리랑카만이 아니라 지금 전 세계에서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는 부지기수다.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탄자니아, 이라크 그리고 우리 민족의 또 다른 이름 북한까지.

국제사회의 강자나 사회 기득권층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당한 과정을 통해 권력을 얻은 정치가, 애민정신을 발휘하는 리더, 갈등을 폭력이 아닌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군부, 자국에 이익뿐만이 아니라 인류 사회의 진보에도 역량을 발휘하는 강자와 사회기득권층은 나도 아주 존경한다.

잊어버린 약자의 눈을 통해, 역사 소설을 쓰는 조정래와 같은 시대의 대변인들이 행하는 작업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책 속의 그들은,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잦은 풍랑을 맞으며 핏빛 영화의 한 장면을 장식했다. 이러한 조정래의 작업은 단순히 닳고 닳은 캐 묵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 제시일 것이다. 힘없는 소수가 자신의 의견을 언제든지 개진할 수 있고 그들을 존중하는 사회 시스템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은 아닐까? 특히 조정래처럼 이러한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만들 수 있는 유명 작가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즈음 사회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판타지와 무협 소설, 연애 소설이 스테디셀러로 서점의 문학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한, 인문학의 위기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과제일 것이다. 문학이 인간 사회의 끼치는 영향을 실로 위대하다.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판되자 한동안 독일에서는 베르테르 세대라고 불리던 젊은 층의 자살률이 급격하게 높아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설 속에서 베르테르는 로즈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자살을 한다.) 문학이 담당한 기존의 역할을 다한다면 결코 문학에 대한 수요층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순수문학이 왜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래, 공지영 등의 일부 작가들은 시대가 흘러도 왜 변치 않는 사랑을 독자들로부터 받고 있는지 이 글을 읽으며 나는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이야기라도 되는 냥 소설속의 주인공이 되어 소설을 읽는 버릇이 있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주인공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에서 나치 군복을 입고 어설프게 서있었다. 추운 바람이 살갗을 뚫고 들어와 따사로운 내 고장을 그리워하게 했고, 큰 키와 큰 코의 백인들의 매서운 눈빛에서 혹시나 총살당하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향수(鄕愁)와 공포(恐怖)였던 것이다.

나의 고향은 구성진 남도가락이 구기자 밭을 타고 흐르는 보배의 섬진도이다. 나는 유학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애향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에 자리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진도에 살면서 낙후된 환경에 사는촌스러운나는 명절에 세련된 옷을 입고 집에 오는 하얀 얼굴의 사촌 동생들에게까지 적잖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 된 후에 어릴 적 냇가에서 함께 멱을 감던 불알친구들, 낙지와 고동에 물씬 베인 갯냄새, 할머니가 구워주신 구수한 고구마가 그리워 남몰래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친 적도 있다.

스리랑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큼한 내 조국의 김치, 아름다운 한글로 쓰인 소설,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온돌방이 못 견디게 그리워서 정해진 기간을 채우지 않은 채로 조기 귀국을 할까 생각하기도 했고, 한인 교회, 추석 한인 축제 등 한인 행사가 있을 때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내가 이 정도였는데, 원치 않은 채로 조선을 떠나 몽골을 거쳐 독일, 미국까지 가게 된 가난한 민초들의 향수는 얼마나 컸을까? 황폐하고 추운 소련으로 강제 이주돼 평생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던 고려인들의 향수는 얼마나 컸을까? 그들은 다함께 포로로 수용 돼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우리 민족의 한이 담긴 민요를 구성지게 부른다.

아쉽게도 그들의 서글픈 민요는 끝끝내 조선에서는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세계열강들의 위대하고 잘난 목적 사이에서 그들이 주장한 내용은 모두 한낱 마이동풍과 같은 부질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뜻을 말이 안 통하는 백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혈서를 썼던 그들의 간절함. 하루의 빵 두개와 맹물 같은 국을 마시며 중노동에 시달려도 저 버릴 수 없었던 귀국의 소망. 버티지 못한 동료들이 한 명, 두 명 죽어갈 때도 놓지 않았던, 끝끝내 부여잡고 놓지 않았던 생에 대한 의지. 두고 온 딸내미의 그 똘똘한 눈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그들은 그렇게 역사의 태풍에 맞서서 맨몸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어떻게 내 가슴으로 들여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현재 사회에는 아름다운재단, 지역아동센터협의회 등의 단체들이 있고 복지 정책은 날로 발전하여, 현재는 외면 받는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적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아사(餓死)당하는 이웃들이 있고, 부정과 가난으로 인해 집과 가족을 잃은 이웃들이 차가운 사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나 홀로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시민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활동들을 할 것이다.

더불어 나는 나의 사상과 철학을 더 깊게, 더 넓게 할 것이며, 사회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더욱 날카롭게 가다듬을 것이다. 작가처럼 펜이 아니더라도 당당한 시민으로서 투표를 하고, 비리를 감시하고, 내 삶에 천착되어 하루하루를 양심적으로 살아 갈 것이다.

희망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라 했다. 땅에는 애초에 길이 없었지만,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기 때문이다. 나도 사회가 아름답게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회에 진정한 유산을 남길 수 있는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있는 나만의 길을 걸어 나갈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휘몰아치는 역사를 자신의 몸에 새기는 고통을 받았다. 나는 내 의지와 노력을 통해 역사의 진지한 순간들을 내 몸에 아로새기는 고통을 즐겁게 인내할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언젠가는 울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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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그 때 생각했던 멋은 철없이 거들먹거리고 우쭐거리는 게 아니었을까? 바지통을 줄인 짱구를 보며 나도 오래 전 내 추억 속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 바람은 새롭게 고등학교로 입학하면서 각 중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이 한 고등학교로 모이며 시작된다. 한반에 뒤섞이면서 치열한 각축전속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열이 매겨진다. 미묘한 알력이 펼쳐지는 영화 바람의 구조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처럼 지나치게 정치적이지도, ‘말죽거리 잔혹사처럼 우울하지 않고 그저 유쾌하고 흥미롭게만 그려졌다. 기억이 달콤한 추억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의 힘일까? 1인칭주인공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짱구가 그 각축장속에서의 승자이기 때문일까?

나쁜 친구들로 오인 받으며 껌이나 쩍쩍 씹고 다니는 그 친구들에게 폼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 폼에는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마치 짱구라는 이름처럼. 극 중 인물의 이름 하나가 얼마나 많은 극적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도 작품을 보는 소소한 재미중의 하나였다. 엉뚱하고 고집스럽지만 순수한 주인공의 이름 못지않게 영화 작명도 기막히다. 영화의 제목 바람은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짱구가 원하는 것, 둘은 짱구가 느끼는 것. 짱구의 고등학교 3년은 바람처럼 흘러갔고, 짱구는 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짱구와 그 패거리의 캐릭터 면에서의 매력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몇몇 전문가들이 학원 액션물 품행제로’, ‘말죽거리 잔혹사’, ‘싸움의 기술등을 철학이 없는 폭력 미화 작품으로 비판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후 나온 이 영화가 얼마만큼 충무로 액션 영화에 발전을 가져 왔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은 학원 액션물뿐만이 아니라 복합장르 영화로서 얼마만큼의 성과를 얻었다. 얼마 전에 한국형 하이틴 영화 써니가 돌풍을 일으켰다. 영화의 주 향유 층이 고학력 여성이었던 시대에서 전 국민으로 바뀐 오늘날, 우리 영화계에 하이틴 영화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바람은 남자들의 하이틴 영화, 더 나아가 교복을 입고 명찰을 달고 다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의 하이틴 영화다. 그때를 그리워하며 오늘날 한반도를 밝히고 있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여, 파이팅!

바람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그래서 성장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글러브’, ‘여행자등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 작품들과 다르게 메시지 전달보다는 작품 내적 재미를 추구하는 바람은 그래서 상영시간이 빠르게 느껴진다. 바람 한 줄기 휙 지나간 것처럼.

바람처럼 흘러간 짱구를 연기한 정우의 놀라운 흡입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실화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그저 그런 저예산 독립영화로 평가받을 수도 있었던 이 작품을 관객평점 9점 이상의 성적을 올리며 충무로의 미래를 밝혔다. ‘워낭소리’,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불청객들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작품이라고 말하기에 무리가 없다.

정우, 이성한의 한국형 액션 라인은 류승완, 류승범 형제의 액션 라인에 필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호평 전에 이성한 감독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관객들이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 극장을 찾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슷한 스타일의 감독인 류승완, 양익준이 보여주는 삶의 애환과 서민에 대한 애정, 사회 참여적 성향 등의 철학적 깊이를 이성한도 그만의 스타일로 갖게 되길 희망한다.

올해 가을 개봉 예정인 그의 차기작 히트에서 그는 정우와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며 우리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할지 기대된다. 왜냐고? 나는 개인적으로 사색의 숲에 부는 가을바람을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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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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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시절 섬마을에서 자랐다. 공기가 맑았던 그 마을에는, 여름에 냉방을 위해 창문을 닫아놓은 집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더우면 창문을 열고 부채를 치거나 선풍기를 켜는 게 전부였으며, 에어컨이 있는 집은 단 한 채도 없었다. 돈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무도 에어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전 아버지의 기일에 고향을 찾았을 때, 예전과는 달리 창문을 열어둔 집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미 우리나라 방방곡곡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으면 더위를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변온동물화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만난 책이 일본 최고의 발명가인 후지무라 야스유키의 플러그를 뽑으면 지구가 아름답다이다. 환경부 지정 우수환경도서라는 스티커가 책에 대한 신뢰를 한층 높여주었다. 이 책은 막대한 에너지소비와 갖은 화학물질들로 만연한 현대사회의 폐해와, 그로 인한 환경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그의 철학과 성과가 잘 반영되어 있다. 다양한 사진과 이해하기 쉬운 저자의 설명은, 글을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저자는 전략화에 반하는 비전력화라는 개념을 통해 오염된 현대사회의 대안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불필요한 플러그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비전력화에 공감하고 응원하는 소비자는 아직 소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대는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나도 저자의 의견에 공감하고 환경의 입장에서 비전력화를 실천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환경이라는 단어 속에서 불편이라는 의미만을 끄집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에너지를 절약하는 일상 속에서 나는 도리어 안락함을 느꼈다. 자취방에서 어머니가 사준 내복을 입으며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이겨냈고, 텔레비전과 컴퓨터의 플러그를 뽑았을 때 주위를 돌아볼 여백이 내 일상에도 생겨났다. 어린 시절 난방비를 절약하기 위해 한 방에 둘러앉은 우리 형제가 서로를 불편하다고 느꼈던 순간은 단 한 차례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나이를 먹고, 요즘 들어 심해진 복부비만은 책의 내용과는 반대로 내가 지금껏 추구해온 쾌락편리의 결과일 것이다. 나는 복부비만의 주범인 다디단 커피를 무척 즐긴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전기포트를 자주 사용하는데, 저자는 전기포트가 전기냉장고보다 더 많은 전력을 소비하는 만큼 사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은 쾌락과 편리를 버리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말은 이러한 상황에 쓰이리라. 내가 전기포트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복부비만도 해소되고, 좋은 환경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전기포트를 혼자 자취하는 친구에게 주고, 새로 압력솥을 하나 구입했다. 압력솥으로 밥을 지으면 솥 안은 고온이 되고 재료 조직이 느슨해져서 열이 빨리 전달된다고 한다. 이렇게 압력솥으로 조리를 하면 불을 끈 후에도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므로 불을 사용하는 시간과 양이 훨씬 적게 든다. 따라서 가스 소비도 일반 솥보다 4분의 1밖에 하지 않아도 된다. 전기밥솥은 보온과 대기전력도 취사와 거의 비슷한 양의 전력을 소비한다. 때문에 최종적으로 압력솥은 전기밥솥의 20분의 1 이하의 에너지만 사용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나는 책을 통해 변화된 나의 일상을 사회참여로까지 이어가고 싶었다. 뭔가 환경을 위해 뿌듯하고 유익한 활동을 하자고 벼르고 있던 찰나에, 환경부와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에너지의 날행사를 돕는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봉사를 통해 책의 연장선에서 다양한 친환경에너지제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처럼 저자의 말대로 플러그를 뽑는 일은 그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새로운 세계의 창을 여는 일이었다. 그것은 인간과 환경의 지속과 다양성을 생각하는 일이며, 문명의 보다 커다란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의 의지를 마음에 담아, 천천히 이어지는 환경의 물결을 지구에 펼쳐나가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까?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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