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학교, 밝은 교실

 

최근 KBS의 드라마 <학교2013>이 충실한 현실 반영으로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얻었다. 학교 폭력, 학생들의 반항, 입시 위주 교육이 <학교2013>의 주요 소재였던 것을 비춰봤을 때, <학교2013>을 통해 최근의 어두운 학교 현실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청자들은 학생들의 반항과 일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교사 직함까지 내려놓고 학생들의 편에 섰던 정인재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하지만 이것이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느꼈던 시청자들도 많았다. 현실의 교육 문제는 교사 몇 명이 변화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의 소설가 루쉰은 희망은 마치 땅위에 길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애초에 땅에는 길이 없었지만,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드라마에서 나와, 현실을 바라보자. 주눅 들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학생들과, 그들의 재주를 믿고 따뜻한 눈길로 기다려주는 선생님들은 과연 우리 사회에 얼마나 존재할까? <우리 반 일용이>라는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가 만든 작은 책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교육에 아직은 희망의 길이 있는지, 일용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우리 반 일용이>는 교실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선생님들의 시각으로 그린 일기 모음집이다. 전체적으로 상처받은 아이들과, 이들을 지켜보는 선생님들의 감동이 이 책의 큰 줄기이다. 일기 속 대부분의 주인공 학생은 단순한 무관심의 차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기피와 혐오를 받는 존재이다.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거의 없거나, 있다 해도 크게 희망적인 것은 아니다. (김명길의 이 새끼 불량품이야에서의 승준, 정유철의 조디.에서의 조형준 등) 이러한 극도의 소외 안에 살고 있는 학생들은 마치 현실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현실에서는 주변부로 존재하는 학생들이, <우리 반 일용이>에서는 주인공이 되어 작품을 끌어가는 점이 참신하다. 대체로 학교에서는 교과 성적만이, 좋은 학생을 설정하는 유일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상석의 스승의 날 선물, 이정석의 지훈이등의 일기는 장애가 있는 학생도 얼마든지 선생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의 편견과 잣대가 장애학생을 억압했지만, 그들이 좋은 선생님과 친구를 만나면서 학생으로서의 삶을 되찾은 내용이다.

한편, 교육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들도 눈에 띈다. 김구민의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원종찬의 아침 교문에서등은 교사 역시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학생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내보인 일기들이었다. 책을 읽으며, 부모의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또 다른 폭력을 가하는 어른들의 각성과 변화도 필요해보였다. 김경해의 일용이, 이주영의 민희 이야기속의 학부모는 학생들의 온전한 생각과 느낌마저 파괴하고 있었다. 가정을 넘어 적나라하게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구자행의 백일장도 인상 깊었다.

마지막으로, 어른들보다 더 깊은 내면을 보여주는 학생들의 이야기는 많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윤태규의 아기를 업고 공부한 정임이, 김현숙의 포도 두 송이등은 학생들이 스스로 끝없이 자라고 뻗어 나갈 재주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 일기들이었다.

 

오늘의 교실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기회의 공간이 아니다. 어쩌면 학생들에게 교실은 생존을 위한 약육강식의 공간일 뿐이다. <우리 반 일용이>에 나오는 몇몇 학생들의 자폐적 의식을 지배하는 심리적 현상은 불안이나 부끄러움이며, 그것을 낳은 사회적 여건은 대부분 가난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책이 개인적인 차원의 비판 내지 감상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전히 교육문제를 의식하는 독자들에게 낯설게 하기의 충격만 주었을 뿐, 그 충격을 바탕으로 어떻게 교육이 변화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난과 편견의 희생자인 학생들이 비극에서 벗어나 다시 안정성을 회복한 점은, 저자들이 교실을 학생들의 자립적인 공간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교육계 차원에서도 교실의 일상을 소외 학생의 생활을 통해 본격적으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 반 일용이>는 교실의 세태를 다룬 일기만은 아니다. 저자들은 학생에 대한 서사적 접근과 아울러 서정적 자아를 통한 내면화도 시도했다. 황금성의 지금도 나를 가르치는 아이, 김광견의 성준이등에서 저자들은 학생들과 화해를 시도하고, 역으로 배우기도 하며, 서사와 서정이 조응하는 서술방식을 구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방식은 이미 머리글에서 예견된 바였다.

 

여기 교실 일기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세요. 놀랍게도 아이들은 저마다 제 힘으로 꿋꿋하게 살아갑니다. (중략) 이 아이들을 보면서 저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재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제 힘으로 살아가고 있지요. (중략) 그래서 아이들한테 배운다는 말을 하는구나, 그래서 지금도 나를 가르치는 아이란 말이 나왔구나 싶었어요. (p.6)

 

교육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교육은 모든 조건에서 독립된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제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들은 신뢰에 기초한 공적영역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우리 반 일용이> 속 교실의 대부분은 처음에는 사제 간의 소통이 더딘 어두운 공간이지만, 그 교실은 학생들의 순수와 선생님들의 사랑으로 아름답게 변한다. 이 아름다움은 교실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간직한, 슬프지만 정직한 아름다움이다. <우리 반 일용이>는 부끄러운 교실을 아름다운 서정의 힘으로 헤쳐나간 셈이다. 저자들이 이 희망의 원리를 치켜들고서 앞으로 세계와 어떻게 싸워나가 더 깊은 울림의 글들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나는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운 선생님, 아름다운 학생을 만난 것이 반갑다.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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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를 꿈꾼다. 자유로운 감정을 찾기 위해 홀로 회사와 가정을 버려두고, 산으로 바다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그렇게 몸뚱이만 떠나는 것이 과연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일까? 이 책속에 떠나는 자유가 아닌 산속 작은 암자에 남아,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사람이 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재산, 가족에 대한 정 등 속세에 대한 바람 없이 부처님에게 귀의한 사람. 그 분이 바로 20세기의 부처라 불리었던 ‘성철’ 대 스님이다. 깨달은 자, 성철 스님은 말 그대로 진정한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스리랑카로 파견되어 봉사활동을 할 때였다. 스리랑카의 유일한 한인들의 절인 사해사에서 탄경스님을 만나고 그곳에서 며칠씩 지내다가 ‘성철스님 시봉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는 반년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동안 고국을 떠나 외진 타국에서 활동을 하며, 심신이 몹시 지쳐가던 시점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내 삶의 나침반이었고, 불안한 정서와 지독한 향수의 한줄기 단비였다. 그 봉사활동을 조기 귀국하지 않고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던 것도 이 책을 통해 내가 불심을 찾으려는 내적 노력을 추구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팀원들과의 갈등, 현지 스텝들과의 갈등, 내 안에서 스스로 부족한 것을 느끼며 움츠러들었던 자괴감까지 책속에 담긴 성철스님의 낡은 사진 한 장으로 녹아듦을 느꼈다.


나는 크게 감명을 받고 탄경스님에게 청연이라는 법명까지 수계 받았다. 불자가 되어 부처님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나에게는 삶의 목적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일찍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더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인 반면에, 외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성철스님과 원택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 꿋꿋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마침내 부처님께 귀의까지 하게 된 것이다.

 

나 같은 미천한 중생들은 육체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 현실의 짐을 내려놓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성철스님은 육체가 어디에 있든, 마음을 놓는 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하안거나, 동안거를 할 때 작은 암자에서 몇 달을 가만히 앉아 수행만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스리랑카라는 큰 사회에서도 답답해 질식할 지경이었지만. 예전에 읽었던 한 책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유명한 작가 한 분은 감옥이 내적 수행을 하는 최적의 장소라고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이처럼 누구에게는 감옥이 수행의 최적의 장소가 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성철 스님에게는 작은 암자가 우주 삼라만상을 마음껏 뛰노는 거대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철스님에게는 이름만을 들어도 느껴지는 묘한 아우라가 있다. 벌써 열반에 드신지 20년이 다 됐지만 지금도 그 아우라는 내게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서 더 커졌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열반에 드셨으니, 지금도 그의 전 생애를 대략적으로 이해하기만도 어려운 나이이지만. 이미 그는 역사가 영원히 기억할 인물 중에 한 분이 되신 것 같다. 나는 미천하지만 용감하게 역사적인 인물과 조우하는 기쁨을 맛본다.


이 책은 원택스님이 성철스님을 시봉한 이야기이다. 원택스님은 독자들이 쉽게 이 책을 즐길 수 있도록 성철스님의 삶을 일화 중심으로 매우 사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원택스님의 노고덕분에 성철스님의 사상이 내 좌심방에서 다시 태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성철스님을 만나 해인사에서 차라도 한잔 대접받은 기분. 차 맛은 쓰지만 달고, 산사는 고즈넉하다. 이 책을 읽으며 썼던 시를 뒤에 덧붙인다.

 

「부처님 오셨다 남루한 눈썹을 차마 들지 못하고
흙냄새 나는 곳에 한 발짝 두 손 짝 기어가
뿌리를 내리고 싶네.
부처님 나무되어 천만년 미소가 염화로 피었구나.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지요
부처님께 물으니
천진한 고승이 목탁을 두드린다.

보살님 차 한 잔 마시고 가시지요」

 

시봉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 동네 뒷산에 올라가면 볼 수 있는 작은 절에 성철스님이 꼭 계실 것만 같다. 혹은 눈 내린 다음날 대문 앞을 쓸고 계신 옆집 아저씨가 꼭 성철스님처럼 생기셨을 것만 같다. 그렇게 성철스님이 이 책 한권으로 다시 우리 삶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이들을 좋아했었다는 스님의 일화가 참말로 인상 깊었다. 성철스님처럼 도가 깊은 분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가 아이들이였다니.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인간은 날 때부터 도를 타고 나지만 속세에서 때가 타서 도를 잊고, 결국은 도와 먼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본연의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참된 도인 것을. 그래서 스님은 책을 읽지 말라고 하셨나보다. 정작 본인은 책을 많이 읽으셨지만, 책을 읽으며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닌, 이미 마음속에 있는 깨달음을 스스로 캐내었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깨우치면 깨우칠수록 아이처럼 순수해졌을 성철스님의 두 눈을 실제로 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삶이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성철스님이라고 하면 부끄럽게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라는 말 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도 사진으로나마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해인사호랑이라는 별명답게 막연히 용맹한 도인 같은 풍모시겠구나 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역시 내 예상처럼 낡은 책속에 담겨진 그의 사진에서마저도 놀라운 기상과 도를 느낄 수 있었다. 실로 그 도가 얼마나 크기에 작은 사진 한 장에서 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성철스님뿐만이 아니라 한국 불교 근대사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와 유명스님들과의 다양한 일화들을 알 수 있었던 것도 흥미로웠다. 성철스님, 원택스님을 비롯하여 법정스님, 불필스님 등의 이름이 나올 때는 띄엄띄엄 알던 한국 불교 명승들의 흐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원택스님처럼 훌륭한 스님이 나오실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성철스님이라는 대 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며, 중생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원택스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한때는 격동의 한국의 20세기 역사를 배우며,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등과는 다르게 사회참여에는 소극적이었던 성철스님을 비판적으로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성철스님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불교와 사회에 대해 생각했고, 종교의 본연의 의미를 살리는데 주력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과거 나치나 일제의 사상에 열광하며 그들을 추종했던 이들을 비춰보더라도, 올바른 앎 없는 무작정 행동만큼
무서운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올바른 앎, 진정한 자유, 절제와 구도, 순수와 자비, 나는 원택스님을 통해 성철스님을 알았고, 성철스님을 통해, 부처님을 만났고, 부처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인을 꿈꾸는 삶을 살게 되었다.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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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댄스타운

영화 비평 2020. 10. 26. 16:24

댄스타운(전규환, 2011)2011년 미국의 댈러스아시안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할 만큼 무산일기처럼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이다. 영화는 북한이탈여성을 두고 벌어지는 다양한 착취와 억압을 건조하게 다루고 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주요 갈등은 다음과 같다. 북한에서 살던 리정림(라미란 분)은 한국산 성인 비디오를 봤다는 이웃의 밀고로 탈북을 택한다. 그렇게 찾은 남한에서 그녀는 북에 두고 온 남편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적응해가려 한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친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친절한 얼굴을 한 국정원 직원(주유랑 분)CCTV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우연히 알게 된 경찰(오성태 분)은 혼자 사는 그녀에게 음흉한 의도로 접근하며, 가끔씩 찾아 돌봐주고 있는 장애인(이준혁 분)과의 관계에도 어느 순간 균열이 생긴다.

영화 속 자유와 민주의 나라라고 말하는 한국에서 북한이탈여성의 인권은 없었다. 국가기관의 비공식적 감시가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합법성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러한 영화 속 국정원 직원 속 모습은 디아스포라에게 닫혀있는 우리 사회의 폐쇄성을 보여주고 있다. 경찰 역시도 자신의 공권력을 부당하게 활용하여 리정림을 강간하는데, 배제된 자들에 대한 국가의 폭력을 경찰의 강간으로 전치시켜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북한이탈남성과는 달리 북한이탈여성들이 성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북한이탈주민이라고 하는 소수자집단에서 다시 소수자집단으로 전락하게 되는 북한이탈여성의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데, 같은 소수자라고 할 수 있는 남성장애인이 자신의 자살을 막으려던 리정림에게 저지른 성범죄는, ‘소수자집단 속의 여성이라고 하는 디아스포라 내의 여성문제를 표면화시킨 장면이었다.

북한이탈주민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가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데에 반해 북한이탈여성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댄스타운은 그 소재면에서도 여타 다른 영화들에 비해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욕망이 배재된 채 그저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듯한 리정림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북한이탈주민을 지나치게 무력하게만 바라보게끔 작동할 수 있다는 염려가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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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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