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남쪽(안판석, 2006)은 총제작비 70억 원으로 당시의 한국영화규모를 놓고 봤을 때는 거액이 투입된 대작이었지만, 전국관객 30만 명으로 흥행에는 참패했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국경의 남쪽의 탈북자라는 소재의 이미지가 아직은 대중성이 없는 것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국경의 남쪽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선호(차승원 분)는 평양의 평범한 중산층으로, 전쟁기념관 안내원인 연화(조이진 분)와 연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한에 살아있는 할아버지와 김선호의 가족이 연락을 주고받은 것이 적발되어 그의 가족은 신분의 위협을 느끼고, 탈북 하여 남한에 정착한다. 남한에서 김선호는 북에 있는 연화와 접촉을 시도하다가 사기를 당하고, 남한에서 만난 경주(심혜진 분)와 결혼하게 된다. 한편, 연화는 김선호와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탈북 하여 남한에 정착하지만, 김선호의 상황을 알게 되고, 다른 남한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줄거리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국경의 남쪽은 인민들이 탈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북한의 현실을 고발하는 정치드라마도,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겪는 고단한 삶을 드러내는 사회드라마도 아니다. 신파적 소재의 멜로드라마일 뿐이다. 이러한 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북한이탈주민의 현실을 너무 낭만적으로 미화한 것은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랑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 것은 평가받을만 하지만, 현실과 괴리된 채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한다는 내용의 판타지는, 북한이탈주민들에게는 생사의 갈림길과도 같을 탈북을 상업적으로만 이용한 것이다.

더불어 아쉬운 것은 극에서 드러나는 연화, 경주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다. 특히, 연화의 경우를 살펴보자. 연화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데리러 오겠다는 선호의 말만 믿고, ‘탈북에 성공한 후 한 번도 연락이 없던선호를 만나기 위해 가족들을 두고 혼자서 탈북을 감행한다. 남한에 정착하고 선호가 이미 결혼했다는 것을 인지한 상황에서도 그가 운영하는 식당을 찾아가고, 그와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등 지고지순한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한국인들의 관념 속에서 북한 등 아시아의 저개발국가 여성이 순수하고, 순종적인 여성으로만 그려지고 있는 것을 상기한다면, 결과적으로 국경의 남쪽이 이와 같은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기여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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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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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 북핵 위기 및 미·북 단독 협상과 억제 실패

 

(1) 협상을 위주로 한 첫 번째 북핵 대응

1989년 프랑스가 영변에 건설 중인 북한의 비밀 핵시설 사진을 공개함. 이에 노태우 정보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북한은 역으로 대북 모의 핵공격 시나리오가 포함돼 있는 한미연합사 주도의 팀스피릿 훈련에 대한 문제 제기함.

1991년 노태우 정부는 판문점 군사회담을 통해 북한이 핵개발 문제와 관련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할 것이라고 제안함. 그러나 북한은 이미 1991년 말 시점에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이 거의 완성단계였음.

1991년 남북공동선언 합의, 1992년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됨.

1992년 북한은 IAEA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IAEA에 핵 프로그램 내용을 담은 최초 보고서를 제출함. IAEA2차 임시사찰 중 최초 북한이 제출한 내용의 오류가 발견되고, IAEA는 추가 사찰을 수차례 요구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NPT를 탈퇴함. 북한은 이때부터 통미봉남 전술을 구사함.

북한과 미국은 뉴욕에서 열린 실무 접촉에서 핵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1994년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하고 3차 고위급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함.

(평가) 한미 양국은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사태가 불거지기 전까지 대화와 협상과 같은 양보의 제스처만 취하면서 결과적으로 북핵 위기를 키우는 자충수를 둠. 당시 한국은 북한과 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 보유 금지에 대한 논의만 진행했을 뿐, 이미 북한이 완성에 근접한 단계까지 개발해 놓은 핵무기에 대한 포기 언급은 하지 않는 실수를 저지름. 또한 북한과 재처리 시설 보유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한반도 비핵와 공동선언을 체결함으로써 차후 우리나라 원전 가동 후 핵연료 재처리 문제에 스스로 족쇄를 채워버린 꼴이 됨.

 

(2) 잘못된 선례 남긴 제네바 합의

1994년 판문점 남북 실무 접촉에서 남측의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팀스피릿 훈련 재개를 검토하겠다는 발언과 북측의 전쟁이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된다는 발언 등으로 인해 협상이 결렬됨.

IAEA는 북한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했고, 북한은 정전협정 무효화와 군사정전위원회 탈퇴를 선언함.

이 같은 전쟁 위기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을 전격 방문, 김일성과 회동함으로써 전환점을 맞음. 북미는 제네바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을 통해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경수로 지원과 중유 등 대체 에너지 제공의 조건으로 폐연료봉을 밀봉하는데 합의하고, 제네바 기본 합의서를 체결함.

이에 따라 미국은 한, 일과 함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를 설립, 북한에 경수로 2기를 건설해주고, 매년 중유 50만 톤을 제공함.

이러한 한반도 문제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배제됨. 한미 양국 간에도 수시로 이견이 발생함.

(평가) 1995년부터 북한과 파키스탄이 우라늄 농축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이 확인되면서 북한의 기만 전술에 넘어가 북한 핵무기 개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시간만 벌어준 꼴이 됨.

 

2. 북핵 위기 재발과 국제협력을 통한 핵문제 해결 실패

 

(1)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다자간 대화 노력의 시작

1996년 북한은 미국에게 자신의 정권 안전을 보장하는 잠정협정 체결을 제안하고, 이어서 비무장지대의 유지 및 관리에 대한 임무 포기를 선언하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중무장한 대대급 병력을 투입해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정전협정의 근간을 흔들며 정전협정을 대체할 완전한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기 시작함.

북한의 이러한 요구에 따라 협상을 통한 북핵문제 완전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논의하기 위한 4자회담이 추진됨.

1차 회담에서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2차 회담에서는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함. 3차 회담에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한반도 긴장 완하를 논의하는 분과위원회를 설치하는데 합의함. 4차 회담에서는 이 분과위의 운영 절차에 대해 합의함. 5차와 6차 회담은 별다른 성과가 없이 끝남.

1998년 뉴욕타임즈는 북한의 핵 개발 재개 가능성을 제기함. 이에 미국은 북미 고위급 회담에서 지하 핵시설 의혹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나, 북한은 답변을 거부함.

북한과 미국은 1999년 금창리 시설을 사찰하기로 하고, 3차 사찰까지 실시하는 대신 그 대가로 북한에 식량 60만 톤을 지원하기로 합의함. 이 합의를 근거로 미국 조사단이 금창리를 방문했으나, 이 시설은 핵 개발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짐.

금창리 핵시설 의혹 해명과 북한의 미사일 모라토리엄 선언 등이 이어지자 미국은 2000, 6·25 전쟁 이후 취해졌던 북한에 대한 대부분의 제재 조치를 완화하는 결정을 내림.

2001년 북한은 새로 들어선 부시 행정부가 기존의 대북정책을 수정할 경우 핵과 미사일 관련한 기존의 합의를 모두 파기할 것임을 경고함. 또한 경수로 건설 지연에 따른 전력 손실을 보상하라고 촉구함. 미국은 북한에 10만 톤의 식량을 지원한다고 발표함.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핵 개발 재개 의혹을 제기하며 핵무기를 포함한 WMD 관련 사찰을 투명하게 받을 것을 요구하고 나섬. 이어서 유엔 총회에서 북한의 핵 사찰 수용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나, 북한은 핵 사찰을 거부함.

미국은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하며 제2차 북핵 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함. 북한은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존재를 시인하였고, 이어서 CIA는 북한이 이미 1~2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추가 제조를 위한 플루토늄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2003년까지 7~8개의 핵무기 보유도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공개하면서 본격적인 제2차 북핵 위기가 터짐.

이에 북한은 중유 공급이 중단되면 제네바 기본 합의를 파기하겠다고 선언하였고, IAEA는 북한의 핵 개발 포기를 요구하는 성명을 채택함. 또한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하는 공동 선언을 발표함.

그러나 북한은 핵 시설 재가동을 선언함. 북한은 IAEA가 설치한 원자로 봉인과 감시카메라를 제거하고,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재처리 시설에 대한 봉인과 감시 장치도 제거함. 또한 북한은 핵 시설 봉인 해제를 완료하고, 감시체계를 완전히 철거했으며, 핵 연료봉 1,000개를 원자로에 장전했다고 발표함. 나아가 북한은 NPT 탈퇴와 IAEA 안전조치협정 폐기를 선언함.

미국이 군사적 공격을 분비하고 중국이 원유 지원을 중단하는 등 강경 입장을 보이자 북한은 돌연 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고, 2003년 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3자 회담이 열림. 이 회담에서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고, 이를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만약 폐기를 원한다면 정권 안전 보장, 대규모 경제 지원 및 경제 제재 해제,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해 협상은 결렬됨. 북한은 미국과의 양자 회담을 원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국제 사회에 공조하여 북한 핵 문제에 대응하며,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개발했기 때문에 개발 저지는 늦었다고 보고 확산 저지로 정책 목표를 선회함.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을 발표하면서 앞으로 북한을 겨냥해 국제사회와 공조하여 핵무기와 미사일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억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냄. 이어서 미국은 북한에게 앞으로의 핵 협상은 CVID 원칙이 적용될 것이라고 천명함.

 

(2) 북 핵개발 시간만 벌어준 6자회담

2003년 제16자회담은 그동안 남북 또는 북미 사이의 문제가 동북아시아 6개 국의 국제 문제로 확대되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주변 5개 국가가 모두 협상 대상자로 나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음.

2004년 제26자회담에서는 회담을 정례화하는데 합의함.

이어서 20046월 열린 제36자회담에서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일괄타결방안에 대해 미국이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최종적으로는 결렬 되었고, 회담 이후 미국 상원이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키면서 6자회담 재개 가능성은 낮아짐.

 

(3) BDA 제재와 국제사회의 재굴복

2005년 제46자회담 1단계 회의에서 미국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제조와 관련하여 고농축 우라늄이라는 표현 대신 ‘UEF’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좀 더 유연한 자세로 협상에 임했으나, 북한이 미북 양자 대화를 통한 구체적인 보상 방안을 요구하며 중단됨.

2단계 회의에서는 북핵 문제는 물론 북한이 요구하는 평화협정 체결 문제와 동북아시아 다자간 안보기구 문제까지 거론되며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9·19 공동성명을 채택했으나, 회담 직후 터진 BDA 사건으로 인해 이 공동성명은 휴지조각이 되고 맘. 북한은 즉각 반발하며 9·19 성명의 내용대로 즉각 경수로 지원 재개와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했으나, 미국은 해성무역, 조선광성무역, 조선부강무역 등 북한 8개 기업을 대량살상무기 확산 개입 협의로 추가 제재 명단에 올리며 북한을 압박함.

200511월 열린 제56자회담 1차 회의에서 북한은 BDA 계좌 동결 문제와 8개 북한 기업 제재 문제를 들고 나오며 이를 즉각 해제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하며 1차 회의는 성과 없이 종료됨.

한국은 미국이 북한의 체제 붕괴를 위한 노력이 계속될 경우 한미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한미 관계에도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함. 한국은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고,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논의에도 비협조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북핵 포기라는 6자회담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함.

2006년 북한은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대포동 2호와 노동 1, 스커드 미사일 등 7발의 탄도 미사일을 연속 발사함. 이에 국제사회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제1695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하며 북한을 압박함. 이 결의안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며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모든 유형의 발사 행위 금지, 모든 유엔 회원국에게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 지원 금지, 북한의 조건 없는 6자회담 복귀와 핵 개발 프로그램 포기 등을 촉구하고 있었으나, 경제나 군사적 제재와 같은 직접적인 조치는 포함되지 않음.

북한은 200610월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지하 핵실험장에서 제1차 핵실험을 강행함. 핵실험 직후 채택된 안보리 결의 제1718호는 대량살상무기 관련 금수 조치와 비군사적 제재만 허용하는 내용을 담음. 이어진 북미 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은 북미 양자 회담 수용, 북한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통한 북한 문제 해결, 미국이 고수해오던 CVID 요구를 거론하지 않는 등의 내용에 합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북한의 위세만 높여줌.

마침내 200612월 제56자회담 2단계가 진행되었으나, 북한은 BDA 제재 해제를 요구했고, 미국이 난색을 표하면서 회담은 결렬됨. 그러나 결국 미국은 20072월 북한 계좌 1,100만 달러에 대한 동결 해제를 통보하고, 9·19 선언을 이행하기로 합의하는 2·13 합의를 채택함.

2·13 합의는 총 60, 2단계에 걸쳐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불능화하고, 미국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중유 지원 재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 등을 약속함. 이에 따라 미국은 BDA 동결 북한 자금을 전액 북한에 반환하기로 발표하고, 북한은 전액을 반환받는 대신 제66자회담 1단계 회의에 참석하기로 약속했으나, 이후 전액 입금되지 않았다며 제66자회담 1단계 회의에 불참함.

 

(4) 협박과 보상 반복이 불러온 잘못된 학습효과

북한이 다시 회담에 복귀한 것은 BDA 자금 대북 송금이 완료되고, 한국이 지원하는 중유 1차 분이 선봉항에 도착한 이후임.

북한은 20076, 핵 불능화 조치가 충실히 이행되고 있다며 5개 국 외신을 불러놓고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였으나, 8월 미국이 확인을 요구하자 불능화 중단을 선포하고, 9월에는 폭파한 영변 핵시설 복구 작업을 시작함. 또한 재처리 시설에 대한 IAEA의 감시 장비를 제거함. 또한 11IAEA 사찰단이 북한에 당도하여 시료 채취 등 검증작업을 벌이려 하자 이를 거부하고 방해하며, 국제사회와의 합의를 이행할 뜻이 전혀 없음을 드러냈고, 이후 완전히 강경책으로 돌아섬.

2009년 북한은 미국에게 대북 적대정책을 청산하고 핵 위협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내놓은데 이어, 국제사회에 미사용 연료봉을 구매해 갈 것을 요구함. 이어서 남북 전면 대결 태세를 선언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것을 공표하며 긴장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결국 3,000km 가량의 사정거리를 가진 것으로 판단되는 은하 2호를 발사함.

유엔 안보리는 4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비난하는 의장 성명을 채택했는데, 북한은 이를 빌미로 IAEA 감시 요원을 쫓아냈고, PSI 등의 제재는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협박함. 이후 미국에서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 법안이 제출되고, 유엔 안보리가 3개 북한 기업을 추가로 제재 대상으로 지정하자 북한은 5월 제2차 핵실험을 단행하고, 한반도가 전쟁상황이라며 위협함. 이에 유엔 안보리는 6월 대북 제재결의인 제1874호를 채택하며 제재 수위를 높임.

북한은 11월 플루토늄을 무기화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고, 서해 대청도 부근에서 해상 도발을 감행하더니, 20103월에는 천안함을 어뢰로 폭침시키며 극도의 긴장 상태를 조성함. 이어서 북한은 11월 영변에서 대규모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하고, 연평도에서 포격 도발을 일으켜 20여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킴. 또한 북한은 2012년 미국과의 2·29 합의를 깨고 장거리 미사일인 은하 3호를 발사함. 이에 국제사회는 20131월 유엔 안보리 대북 제개 결의 2087호를 채택하며 제재 수위를 높임.

북한은 2월 제3차 핵실험을 강행하며 핵탄두 소형화와 고위력화에 성공했음을 발표함.

(평가) 유엔을 통해 이루어진 국제적 대북 제재안은 원칙대로 시행되었을 경우 북한에 대해 치명적인 경제적 타격을 줄 수 있었지만, 중국의 유엔 제재안 미준수와 러시아의 소극적 동참으로 인해 미국이 취한 통치자금 동결 외에는 실질적인 제재 효과를 거두지 못함. , 북한은 실효성 없는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와 중국의 비호 속에서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핵개발을 위한 15년 이상의 시간을 벌었고, 이를 통해 실전 사용이 가능한 핵탄두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에 협상을 통한 국제사회의 대북 핵 포기 노력은 사실상 아무 효과가 없었음.

 

3. 외교적 노력의 한계와 군사적 대응의 타당성

 

(1)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키운 북한의 핵능력

1993년 제1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을 당시 국제사회는 군사력을 동원해 해결 방안을 모색함. 당시 미국 정치권은 초당적 차원에서 대북 군사 행동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을 촉구함. 실제로 당시 미국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정밀 타격을 준비하고 있었음.

미국이 본격적인 군사 행동을 준비하자 북한은 방북한 카터 전 대통령에게 대화 의사를 피력하고,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하여 5개월 만에 제네바 합의에 서명함. 그러나 미국은 이미 북한이 플루토늄을 이용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아직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고 현재 진행형인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사찰만을 조건으로 대규모 보상을 약속했기 때문에 북한에게 위협을 통한 긴장 조성 = 보상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 첫 번째 선례를 만듬. 이 선례 이후 북한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결코 전쟁을 각오할 의지가 없음을 인식했고, 전쟁을 주저하는 국제사회를 상대로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며 핵무기와 미사일을 이용한 갈취 외교를 전개해나가기 시작함.

2002년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시인하며 불거진 제2차 북핵 위기 당시에도 국제사회는 협상을 통한 북한 핵문제 해결방안을 모색함.

1차 핵실험 이후에도 국제사회는 군사적 옵션은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안보리 결의안 1718호를 채택하는 수준에서 대북 제재를 결의했지만, 무역과 금융자산 등에 대한 제재만 언급된 이 결의안은 북한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자 우방인 중국의 비협조로 사실상 북한에 거의 피해를 주지 못함. 문제는 이러한 결의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국제사회는 추가적인 제재 옵션을 고려하기보다 북한의 강경 대응에 굴복해 북한이 요구하는대로 BDA 계좌 동결 조치를 해제해주는 전략적 판단 착오를 저지름.

결국 북한은 2009년 제2차 핵실험을 강행했고, 2012년에는 은하 3호를 발사하고, 2013년 제3차 핵실험을 단행함.

3차 핵실험은 기존 두 번의 핵실험과는 성격이 다름. 전술 핵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위력이 부족했던 기존의 1·2차 핵실험은 북한이 핵분열을 이용한 폭발 장치를 개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정밀한 기폭장치 제조에는 실패해 핵분열 효율성을 완벽하게 끌어내지 못했고, 이는 고위력화는 물론, 소형화에도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임. 그러나 추정위력 40kt을 달성한 제3차 핵실험은 북한이 약 30여 년간에 걸친 핵무기 개발을 사실상 완료하고, 핵탄두를 실전배치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뜻함. 이는 한국과 미국 등 국제사회가 30여 년에 걸친 북한의 핵개발 과정에서 이를 막기 위해 펼쳤던 모든 행위들이 사실상 무의미했다는 뜻임.

 

(2) 국제사회의 다섯가지 실책과 군사적 대응의 필요성

첫째, 북한 핵개발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국내 정치 상황을 고려해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고, 대응 행위의 목적이 핵개발 방지라는 예방적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의 시점이 이미 고농축 우라늄 생산이나 플루토늄 추출이라는 행위가 이루어진 뒤에 행해졌다는 점임.

둘째,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핵무기에 대한 대응 방안을 강구하기보다는 우라늄 농축이나 플루토늄 추출과 같은 제조 과정에 대한 사찰과 제재에만 초점을 두고 대응해왔다는 점임.

셋째, 북한이라는 믿을 수 없는 상대와 협상을 진행하면서 반드시 필요한 CVID 원칙을 스스로 내려놓아 북한의 합의 이행을 검증할 수 없는 틀 안에서 일방적인 보상을 제공하여 북한이 합의 이행에 대한 의무감을 갖도록 노력하지 않음.

넷째, 위기 상황이 조성될 때마다 무력 사용 옵션은 배제하고 협상을 통한 사태 해결만을 강구함.

다섯째, 실효성 없는 제재를 남발함.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대응은 그들의 통치 기반과 실질적 핵 능력을 위협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할 수 있는 옵션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립해야 함. 북한의 통치기반을 위협할 수 있는 수단으로는 종래와 같은 외교적 수단, 특히 해외의 통치자금에 대한 직접적인 제재가 가장 유효함.

또한 투트랙 전략으로 군사적 옵션이 필요함. 군사적 옵션을 통해 북한이 이미 보유하고 있거나 보유할 수 있는 핵무기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여 그들의 핵무기를 협상용으로 사용할 수 없는 무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군사적 옵션을 공세적으로 활용하여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통치수단에 대한 직접 타격이나 핵 시설 파괴 등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임.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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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연대별 대남 도발 현황

1950년대에는 정치적 테러리즘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1958년 민항기 납북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대남도발이 본격적으로 자행된 시기이다. 항공기와 어선 납치, 김신조 일당의 대통령 암살 기도 사건 등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대남도발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이다. 1983년 미얀마 랑군에서 전두환 대통령 암살기도, 1987년 칼기 폭파 등이 있었다.

1990년대 초는 대화와 통일의 공세 시기이다. 1990년대 중후반은 안보 위협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이다. 대남 도발은 동해안 강릉에 상어급 잠수함이 침투하여 무장간첩 24명이 사살되고 1명이 생포되었다. 이어서 서해의 북방한계선에서 한국해군과 북한해군과의 제1차 연평해전(1999. 6. 15.)이 발생했다. 엔엘엘을 월선한 북한 경비정을 한국 함정이 밀어내기식 작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북한 경비정의 선제공격으로 교전이 시작되어 북한의 어뢰정 1척이 침몰되고, 경비정 4척과 어뢰정 1척이 손상되었다.

2000년대는 대남유화시기이지만 대남 도발은 지속됐다. 2002. 6. 29. 북한 해군 경비정의 선제공격에 의해 제2차 연평해전이 발발하여 한국해군 고속정이 침몰하고 다수의 전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어서 북한은 전격적으로 1차 핵실험(2006. 10. 9.)을 감행하여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제 1650호와 1718호에 의거 국제사회의 제재를 초래했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강경기조를 유지하자 북한은 초기 단계에서는 각종 구두협박을 하다가 점차 탄도미사일 발사(2009. 2. 24.), 2차 핵실험(2009. 5. 25.)등의 강경 대응으로 위기의 수준을 점진적, 단계적으로 높여 갔다.

2010년대는 가장 강력한 무력 도발이 발생한 시기이다. 천안함 폭침은 백령도 근해에서 초계임무를 수행하던 천안함이 폭침(2010. 3. 26.)되어 46명이 전사한 사건으로, 국내외의 전문가로 편성된 정부의 민군합동조사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하였음을 공식 발표하였다. 이 도발로 인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보위기가 고조되었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천안함 공격을 규탄하는 의장 성명을 채택하였다(2010. 7. 8.). 더욱 강도 높은 무력 공격은 연평도 포격이다. 천안함 폭침 이후 8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북한군은 대낮에 연평도의 군부대뿐만 아니라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 거주 지역에도 170여 발의 무차별 포격을 가해(2010. 11. 23.) 민간인 2명과 군인 2명이 사망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 영토에 대한 최초의 직접적인 무력공격이었다.

 

북한 대남 도발의 평가

환경적측면

- 한국 요인 + 미국 요인

- 안보 위협이 높아지면 대남도발을 돌파의 수단으로 이용

의사결정체계의 측면

- 정치적 활용

- 국가전략체계의 영향

수단의 측면

- 화전양면전략을 구사

안보환경과 대남도발 시기와의 상관관계

-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체제 구축 시기로 후계자 선전과 업적 쌓기, 북한 주민들의 체제 결속을 위한 것으로 보임

- 당의 민간 출신 대신 군부가 대남 공작기구를 장악한 시기로 군부를 통해 어느 때보다도 극력한 군사모험주의의 도발을 수행

- 한국에서 국제적 행사 개최 시점으로 한국 내에 극도의 혼란 상태를 유발하여 국제행사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

- 한국의 새로운 정부 출범 시기로 위기 조성을 위해 남남갈등을 유발하여 새 정부의 대북 정책을 북한에 유리하도록 유도하면서 대미, 대남 협상에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서임.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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