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74일생]론 코빅이라는 실제 베트남 참전군인의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영화는 론을 통해 미국의 야만적인 역사와 함께 베트남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태어난 론은 애국심과 영웅심에 도취되어 베트남전에 해병대로 지원한다. 그는 베트남으로 파병되어 민간인을 학살하고, 자신의 부하를 실수로 죽인다. 그 역시 총상으로 인해 생사의 고통을 넘나들다가 하반신 마비가 되고 만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시위대를 보며 당황한다. 그가 사랑하던 도나도 자신의 신념과는 달리 시위에 참여하자, 그는 절망한다. 상실의 늪에서 그를 건져 올린 것은 자신이 죽인 부하 윌리엄에 대한 그의 사죄였다. 베트남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불면에 시달리던 론은 사죄를 통해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죄의식에서 벗어나자, 또다시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나오는 것을 막고자 반전운동에 참여한다.

이 영화를 보며 어떤 정치적 방향성도 없던 보통 사람이 어떻게 정치적 투사로 거듭나게 되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었다. 반전운동 속에서 론이 가졌던 기존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데모 학생들에 대해 발포명령 내리기를 서슴지 않는 위정자들의 도덕성에 회의를 느끼면서 그는 세상의 위선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전쟁이 발발했을 때, 가장 불쌍한 것은 힘없는 국민일 것이다. 헛된 명목으로 목숨을 걸고 참전해야 하고, 전후 적절한 보상을 받는 것도 어렵다. 베트남전과 마찬가지로 위의 영화 [더 리더]의 배경이 된 제2차 세계대전을 함께 생각해보자. 그 전쟁에서도 가장 많이 죽은 국민은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국민들이라고 한다.

제국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의 집중과 군부의 대두를 수반한다. 베트남전에서의 교훈은 망각한 채, 9·11테러를 계기로 미국의 국제관계는 무력으로 밀어붙이는 군국주의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현재 미국의 군사비는 전 세계 군사비의 약 40%에 달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 세계 38개국에서 725개의 군사기지를 보유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미국은 탐욕적인 제국이 아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진정 민주주의의 수호 국가일까? 이러한 질문 자체가 독립국가 베트남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을 영화는 증명하고 있다.

가스통 든 할아버지들, 당장 객석에 앉아 당신들이 사랑하는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두 눈 부릅뜨고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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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만든 영화를 강의에서 만날 수 있어서 뜻 깊었다. 특히, 고등학교 때 봤던 [아버지의 깃발]과 함께 봐야하는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미국과 일본 양국의 입장에서 같은 사건을 파악할 수 있어서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고, 일본의 입장을 전달하려고 노력한 영화이지만, 미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태생적으로 미국인의 시각이라는 한계를 지녔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오지마 전투를 비롯한 전쟁은 수많은 개개인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러한 전쟁은 단지 위정자 몇 명의 승인만 있으면 시작될 수 있다. 나는 이 영화 속 개개인의 희생을 보며, 전쟁을 일으키는 소수권력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회의를 느꼈다. 제국의 부와 명예는 제국의 모두가 누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제국 안의 소수에게만 그러한 이윤이 집중될 뿐이다. 그 부를 위해 제국 안의 다수, 제국 밖의 모든 인류가 그들이 일으킨 불필요한 갈등(전쟁)의 희생양이 돼야 하는 것이다.

국가라는 미명 아래 짓밟히는 개개인들의 소중한 가치는 주인공 시미즈의 대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조국을 위해, 천황을 위해 나의 임무를 다하고 싶어. 하지만 개죽음은 당하기 싫어.” 자신의 목숨을 걸만큼 생애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 목표가 어처구니없게도 조국천황을 위한 것이라면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 아시아의 민중들을 짓밟는 조국, 죽음을 강요하는 천황이 어찌 생명을 희생할 만한 놀랍고 대단한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쩌면 조국이 제국이라는 것은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러한 제국을 곁에 둔 이웃나라 국민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특징과 문제들을 잘 집어냈다. 무기가 떨어진 일본군이 항복이 아닌 집단자살을 감행한 장면처럼, 기본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는 정부, 군부, 국민의 집단적 광기가 기반이었다. 이는 사무라이 정신, 천황에 대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충성 때문에 나타난 황당한 행동양식이다.

이 영화는 일제를 미화했다는 명목으로 국내에서는 개봉되지 못했지만, 세계 유수의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우리의 입장에서 다소 아쉽고, 안타까운 부분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아버지의 깃발]을 통해 미국의 입장을,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통해 일본의 입장을 전한다는 것은 역사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 심각한 편견을 불러올 수 있다. 양국의 희생자들이었던 필리핀, 한국, 중국 등의 입장도 영화 곳곳에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고래싸움에 터진 새우등을 위로하는 영화는 언제쯤 만들어질까?

영화 초반 강제징집 된 일본군이 작업하는 것으로 나오는 노동들은 실제로 대다수가 강제로 일본군에게 끌려온 조선인들에 의해서 실시되었다고 한다. 이 가혹한 강제 노역 중에 많은 조선인들이 죽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역을 견뎌낸 조선인들은 일본군이 되어 천황을 위해 미국과 싸워야하는 처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오지마 전투가 끝나고 약 40여명의 조선인 포로가 발견되었다.

이오지마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처럼 자신들이 신봉하는 천황과 조국을 위해 징집되어 온 일본군이 아니라, 그런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와 물과 식사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강간을 당하고, 노동하고, 전투에 참가해야 했던 조선인들이다. 실제로 일제는 조선뿐만이 아니라 중국 등에서도 만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때 함께 파시즘적 제국주의를 형성했던 독일, 이태리와는 달리 지금도 위정자들이 나서서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갖거나, 이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야스쿠니 신사를 유력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일 등일 것이다. 최근에는 오사카의 시장인 하시모토 도루가 성노예 강제동원과 관련해 피해자들의 증언은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면서 일본이 조직적으로 식민지 여성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한 증거가 없다는 발언을 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채, 집단 치매에 걸린 일본은 늙은 호랑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해야,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겪었던 설움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반일을, 일본은 혐한을 없애는 일은 진짜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일본은 경제를 넘어 인류애로도 선진국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조그만 섬에 갇혀 자위대로 자위하는 짓부터 그만두어라.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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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배포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 등의 유대인 중심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에게 행하는 무분별한 폭력과 범죄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유대인 학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반면에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위와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나치 추종자들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영화라 참신하고 흥미로웠다. 전쟁세대를 대표하는 여인과, 그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소년의 사랑이 이 영화의 주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36세의 여인과 15세 소년의 섹스, 그리고 전범자의 전범 시기 속에서의 사랑을 미화하고 있는 것이 다소 자극적이고 문제적으로 느껴졌다.

작품 속 36세의 여인 한나는 무지한 인물이다. 한나는 글자를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자, 전쟁에 세뇌당하여 사리 분별을 할 줄 모르는 까막눈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치주의자들은 한나 같은 평범한 국민을 상대로 선동정치를 계획적으로 조장하였고, 나치의 실력자였던 괴벨스는 정치에서 선동의 역할이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하고, 선동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나치의 선동은 공보부가 모든 미디어를 통해 주도하였다고 한다.

한나는 이와 같은 선동의 영향을 받아 살인을 방조하는 중죄를 지었지만, 영화 속에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한나를 단순한 죄인이라고 치부하기 보다는, 시대의 부조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보는 관점이 부분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나를 비롯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분명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며, 독일인을 넘어 인류 모두가 계속 상기해야 할 두려운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나치 중에는 한나처럼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행동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이유로 모든 나치의 하급 관리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비원을 포함한 나치에 복무했던 하급관리 거의 모두가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숨기려고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율과 규칙을 목숨처럼 여기는 한나는 이와 달리 당당하게 행동한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있으면 보통 사람은 부끄러워하지만, 한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위에서 시켰다는 분명하고 고지식한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할 때 정당한 이유가 있던 그녀는, 사회가 자신에게 부여한 죄를 하나도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의 상황에만 지나치게 몰입해 한나의 죄를 생각하는 것은,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게 되는 것 아닌가하는 상대적인 반감이 내 마음속에 동시에 들기도 했다. 실제로 영화는, 유대인학살은 단순히 무지한 결과이므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통렬히 반성하며, 가해자들에게 적당한 벌을 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한편, 한나가 나치전범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마이클은 혼란에 빠진다. 마이클은 한나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지만, 한나의 죄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나는 과거의 잘못된 이념 속에서 살던 사람이라면, 마이클의 현재의 달라진 사회를 사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마이클이 미래를 상징하는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는 장면이었다. 이처럼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관계 속에서 사회는 성장하고 발전한다. 최근 독일은 우리의 일베처럼 네오나치즘이 문제가 되고 있다. 네오나치즘은 나치즘의 현대판으로서 나치 독일과 나치즘의 부활을 추구하며 극우, 민족주의적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네오나치즘은 외국인노동자 등 타 인종에 대해 증오와 분노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달라진 시대 속에서, 마이클의 딸은 한나처럼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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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작품으로 1987년에 개봉한 영화 [마지막 황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역사적 변혁을 거치며 평범한 시민이 돼가는 푸이의 인생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으며, 모든 대사는 영어로 되어 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며, 프랑스의 역사를 영어 대사로 만들어 놀랐는데, 중국의 제국이었던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이야기마저 레미제라블 개봉 훨씬 이전에 영어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시 현대의 새로운 제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푸이는 고작 3세의 나이로 청나라의 황제에 오르지만 위안스카이와 쑨원과의 협약에 따라 이내 퇴위한다. 협약의 내용에 따라 외국 군주의 대접에 준하여 청나라의 황제 대우를 받지만 자금성 내에서만 한정될 뿐이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실권이 사라지고 자금성 안에서만 자라야 했던 푸이는 영국인 가정교사 존스턴 밑에서 영국유학의 꿈을 꾸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푸이는 존스턴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양복, 자전거, 안경, 전화나 영어잡지 등의 유럽의 최신 수입품을 접하게 된다. 푸이는 자금성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 변발을 자르는 등, 존스턴이 가져온 서양의 생활양식과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푸이는 이후 펑위샹의 쿠데타로 인해 결국 가족과 함께 자금성에서 쫓겨나지만, 자신이 대대로 내려오던 만주국의 영도자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만주국의 황제가 된다. 하지만 그를 도왔던 일본이 새로운 제국주의 야욕을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푸이의 톈진 이주는 만주에 본격적 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 관동군과 푸이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중화민국 정부는 만주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푸이의 행보에 곤혹스러워 했다.

푸이는 193431일에 만주국 황제에 즉위하여 강덕제가 되었다. 관동군의 주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만주국의 헌법상에서는 황제는 국무원 총리를 시작으로 대신들을 임명할 수 있었지만, 차관 이하의 관료에 대해서는 1932년 조인한 <일만의정서>에 의해서 관동군이 일본인을 만주국의 관리에게 임명 혹은 파면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관동군의 동의가 없으면 임면 할 수 없었다. 황제의 칭호는 허울뿐이었고 일본의 괴뢰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국체에 관련되는 중요 사항의 결정에는 푸이뿐만이 아니라 관동군의 인증이 필요하였고 만주국 관직의 약 절반을 일본인이 차지하였으며 건국 당초 만주국 독자적인 군대나 국적법이 존재하지 않는 등, 관동군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 이후 만주국의 사라지고, 푸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포로로 잡혀 수용 생활 이후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전국위원을 지냈다. 제국의 황제에서, 평범한 정원사가 되어 살아가는 푸이. 이제는 외국인 관광객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으로 변한 자금성. 중화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푸이에 대한 자료를 찾으며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는 다음과 같은 인민푸이의 말년의 모습을 발견했다.

한 멕시코 기자가 푸이를 인터뷰하러 가서 마지막 황제 푸이는 처참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한 미국 언론의 오보를 상기시키자 맞다. 마지막 황제이며 일본 침략자들의 괴뢰였던 푸이는 이미 죽었다. 나는 새로 태어난 노동자다라며 푸이는 정부의 비위를 맞췄다. 친척이나 예전의 신하들, 식물원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황상(皇上)”이라고 부르거나 재미 삼아 어이, 황제라며 웃을 때도 나는 예전의 푸이가 아니다. 황제 푸이는 지은 죄가 커서 이미 죽었다. 나는 평민 푸이다라며 진지하게 말했다. 남들이 까먹을 만하면 오랜 기간 제왕 생활을 하다 보니 나쁜 습관이 몸에 뱄다. 아직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다는 유의 말을 반복했다. 소속이 베이징식물원이다 보니 화단에 물을 주는 장면이 가끔 신문에 실렸다. 일반 중국인들은 푸이가 바느질하는 모습이나 빨래하고 청소하는 모습도 화보 등을 통해 자주 볼 수 있었다.

 

영화 속 화려하고 웅장한 자금성의 모습을 먼저 이야기 하고 싶다. 34년 전에 자금성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다. 자금성은 베이징의 중심에 있는 명과 청 왕조의 궁궐이다. 자금성의 규모는 궁궐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현재는 황실이 사라져서 중국어권에서는 주로 고궁으로 불리고 있으며, 192510월 고궁 박물원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방문했을 당시, 한국의 궁궐을 압도하는 크기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 자금성의 주인이었던, 청나라는 만주족과 한족이 명나라에 이어 만든 나라이다. 원래 청나라는 1616년에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동북 지역에 건국한 금(후금)에서 시작하여, 훗날 청으로 국호를 바꿨다. 청나라 초기에는 훌륭한 황제들(강희제, 건륭제)이 통치했다. 한족의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몽골 제국(원나라)을 제외한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이루었다. 청나라 시대에는 외국 무역이 더욱 활발해져, 은의 유입도 크게 증가하였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자금성에 이어 인상 깊었던 장면은, 중국의 서구화를 갈망하며 서구문화를 적극 수용하려고 하는 푸이의 모습이다. 이는 푸이가 안경을 착용하고, 청나라의 복잡한 전통 혼례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탭댄스를 잘 추는 현대여성을 황후로 맞고 싶고, 서양식 단발을 도입하기 위해 변발을 잘라 주위를 경악시키는 행동에서 드러났다. 이미 아편전쟁, 태평천국운동, 청나라 내 변방의 반란 등을 통해 제국은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마저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노력보다 서구화에 편입돼 가는 모습 속에서 제국의 역사의 덧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서구문화의 동경은 비단 푸이에게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서양의 일부일처제 및 신사조에 눈을 뜨고 푸이 곁을 떠나는 후궁 문수에게도 무너져가는 제국의 모습이 보였다.

상징적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대사 “Open the door” 못지않게 영화 속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는 당신은 나에 대해 아는 게 없소라고 말하는 하인의 대사이었다. 실제 대사처럼 푸이는 하인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권력이 사라진 자신에게, 자질구레한 일을 해주는 하인에게는 부인과 세 아이가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쩌면 청나라 멸망의 이유가 바로 이 대사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비단 청나라라는 중화제국 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제국, 혹은 위정자들이 백성들, 혹은 주위 나라들을 돌아보지 못한 채, 자기 자신밖에 볼 줄 모른다면 그 제국은 결국 멸망하고 만다.

 

4)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이탈리아 출신의 영화감독이다. 1962, 감독 데뷔작 [‘즉사혹은 냉혹한 학살자’]가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영화감독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대담한 성적 묘사로 알려지면서 예술인가 포르노인가의 논의가 제기되었다.

 

5) 신해혁명(辛亥革命)1911년 청을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이다. 이 혁명은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라서 공화혁명이라고도 불린다.

 

6) 아편 전쟁(Opium Wars)19세기 중반에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7) 청나라 말기 홍수전이 창시한 배상제회라는 그리스도교 비밀결사를 토대로 청조 타도와 새 왕조 건설을 목적으로 일어난 농민운동(185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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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조페의 1986년 영화 [미션]은 스페인제국의 식민지 정책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신대륙 원주민들에 대해서, 스페인제국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의 식민지 정복을 시도했다. 하나는 정치적 정복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정복이었다. 이 영화는 정신적 정복에 더 집중해서 스페인제국을 그리고 있다.

 

스페인은 알폰소 10(1221-1284)가 나폴리를 정복함으로써 지중해로 진출하게 되었고, 시칠리아, 세르데냐, 동방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14세기 후반 스페인에서는 재정복전쟁 와중에 까스띠야왕국과 아라곤왕국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1479년 아라곤왕국의 페르난도2세와 까스띠야왕국의 여왕 이사벨(1451-1504)이 결혼을 함으로써, 스페인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이 당시 스페인제국은 새로운 부의 원천을 찾고자 하는 현실적 열망이 강했다. 콜럼버스가 스페인제국의 아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을 찾아와 항해를 제안하면서 스페인이 다른 영토를 정복할 비용을 충당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신대륙 발견으로 이어져 멕시코와 페루에서 발견된 은의 유입으로 스페인제국의 막대한 부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신세계의 은광은 1620년까지 은 생산량이 크게 증대되고 그 수준이 꾸준히 유지되었다. 스페인제국의 은광이 가지는 중요성은 본질적으로 심리적인 것이었다. 끝없이 유입되는 것으로 인식된 새로운 부는 왕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외국인 은행가들을 부추겨 펠리2세로 하여금 엄청난 대규모 사업들을 계획하게 만들었다. 이로서, 스페인제국은 생활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문화 활동이 활발하였던 황금세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신대륙에서 유입되는 금과 은은 경제적인 부와 동시에 문화예술의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뚜렷한 2개의 문화적인 흐름은 르네상스와 바로크이었다.

 

한편 이 당시 가톨릭은 세속화되었고, 동시에 종교개혁으로 인해 그 권위와 실질적인 권세에 있어서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런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가톨릭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교회 쇄신운동이 예수회였다.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이었던 만큼 보수적인 출발점을 가진 예수회였지만 그들의 전교(mission) 방식은 오히려 개혁적이었고, 상당한 융통성을 가진 것들이었다. 그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백인들처럼 원주민들을 사람과 비슷한 짐승으로 보지 않았고, 그들도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회 신부들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원주민들을 전도할 수 있도록 한 데에는 스페인제국의 이해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를 정복하고, 개척한 자들에게 스페인제국은 특별한 혜택을 주고 있었다. 그것은 엔코미엔다라는 것이었다. 엔코미엔다는 16세기 스페인령의 공역제도로서 이것을 받은 정복 이주민들은 인디오 원주민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키고 보호할 의무를 지님과 동시에 이들에게 강제 노역이나 공물을 요구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런데 이런 혜택을 받고 있던 정복 이주민들의 힘이 점점 커지자 스페인제국은 이들을 적절히 견제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그때 예수회 신부들의 선교활동을 적절히 이용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회 신부들은 잔악한 노예상인들로부터 원주민들을 보호하는 자치구역을 만들었고, 많은 도망 노예들이 이곳으로 탈출해왔다. 이런 예수회의 활동은 정복 이주민들의 반감을 불러왔고, 정복 이주민들은 시시때때로 원주민보호구역을 무력으로 공격하는 일도 잦았다. 실제로 예수회 신부들은 스페인 국왕의 승인 아래 무장을 허가받아 정복 이주민들과 전쟁을 벌인 적도 있었다.

175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의 영토를 교환하는 국경조약이 체결된다. 이에 항의하는 원주민들과 예수회 신부들은 두 차례(1754, 1756)에 걸친 포르투갈과 스페인 군대의 무력 공격에 학살당하고 만다. 그리고 얼마 후에 스페인에서 예수회 추방이 시작되었다.

 

영화 [미션]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신부가 원주민 지역으로 들어가 자신의 가방에서 오보에를 꺼내 연주를 하는 장면이다. 제국의 거대한 탐욕을 넘어, 인류애를 드러내는 종교의 숭고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노예상인 로드리고가, 자신이 학대하고 노예로 사냥했던 원주민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받으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예수회 신부의 일원이 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의 조약은 예수회 신부들이 사랑하는 원주민들을 다시 노예로 살아갈 것을 강요하게 만들게 되고, 영화 속 원주민들과 함께했던 예수회 신부들은 모두 전사하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회 신부들을 설득하기 위해 교황청에서 파견되었던 주교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쓴다. “표면적으로는 신부 몇몇과 과라니족의 멸종으로 끝났습니다만, 죽은 것은 저 자신이고 저들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말입니다.” 살아남은 과라니족 아이들이 줄 끊어진 바이올린을 들고 더 깊은 정글로 숨어드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요한복음 1장의 말이 자막으로 올라간다. ‘빛이 어둠을 비춰도, 어둠이 이를 깨닫지 못하더라.’

 

영화를 보며 감동적이지만 한편으로 불편했던 것은, 영화가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이고 기독교 중심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화 속 스페인제국 침략에서 과라니족을 비롯한 원주민들은 또다시 타자화 되고 있다. 영화 속 과라니족은 지나치게 수동적이다. 제국과의 전투에서 과라니족이 아닌 예수회 신부들이 군을 지휘하고, 예수회 신부들마저 원주민들과의 융화 속에서 원주민에 대한 계몽의식과 선각자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원주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 스페인제국이 신에게 벌을 받았는지, 이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스페인은 애초에 사회경제적 기반이 근대의 제국들과는 달랐다. 산업혁명을 통한 안정적인 재정력을 통해 제국을 확장시켜 나갔던 근대제국들과는 달리 스페인의 산업발달 수준은 후진적이고 과도기적 상황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영토 확장을 했고, 내수 경제에 투자 되었을지도 모르는 이윤은 사실상 대부분 군비로 지출되었다.

전쟁은 사그라지지 않고 17세기까지 장기적으로 이어지는 국가 파산의 사슬을 촉발시켰다. 심지어 펠리페 2세 치하의 카스티야 재무국은 카를 5세가 야기 시킨 부채 부담에서 헤어날 수 없어서 매 20년마다 파산을 선고했다 후반기로 갈수록 제국의 이상보다는 오히려 경제적 현실이 스페인 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스페인 제국은 백성들과 관료들에게 평화의 요구를 받았다. 앞서 언급한 재정적 원인뿐만 아니라 스페인은 내부 행정적으로도 고충을 앓고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식민지 확장을 하면서 본국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필요 이상의 관직들이 생겨났다. 세기를 거듭할수록 본국에서는 관료들의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식민지관료들은 중요한 지배층이 되어 본국으로부터 독립성이 높아졌다. 본국의 영향력이 적어지면서 원주민의 반란도 많아졌고, 18세기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시몬 볼리바르로부터 해방의 흐름이 불기도 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도 끊임없이 위협을 받으며 스페인 제국은 한 세기의 마지막 4분의 3을 전쟁으로 소모했다. 스페인은 평화가 간절했지만, 평화는 스페인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이런 총체적 난국 앞에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스페인 제국은 찬란하게 빛나다 지고 말았다.

 

1) 르네상스는 중세의 획일적인 신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학문이나 예술창작 등을 통한 인간중심의 시대로 돌아가, 그리스로마의 고전주의를 이상향으로 여기고 이를 재생하려는 운동이었다. 다시 말해,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시대의 고전주의를 동경하며 중세의 종교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문화현상이다.

 

2) 바로크 문화는 스페인 문명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들 중 하나며, 16세기중엽이후 17세기말엽까지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의 시기에 유행하였다. 바로크문화는 새로운 종교적 교리와 종교 작품들을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바로크의 전반적인 특징은 매우 화려하며, 매우 다양한 예술적인 표현을 허용하였다.

 

3)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의 독립 운동가이자 군인이다. 호세 데 산마르틴 등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로 불린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를 그란 콜롬비아로 독립시켰다.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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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그 때 생각했던 멋은 철없이 거들먹거리고 우쭐거리는 게 아니었을까? 바지통을 줄인 짱구를 보며 나도 오래 전 내 추억 속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 바람은 새롭게 고등학교로 입학하면서 각 중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이 한 고등학교로 모이며 시작된다. 한반에 뒤섞이면서 치열한 각축전속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열이 매겨진다. 미묘한 알력이 펼쳐지는 영화 바람의 구조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처럼 지나치게 정치적이지도, ‘말죽거리 잔혹사처럼 우울하지 않고 그저 유쾌하고 흥미롭게만 그려졌다. 기억이 달콤한 추억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의 힘일까? 1인칭주인공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짱구가 그 각축장속에서의 승자이기 때문일까?

나쁜 친구들로 오인 받으며 껌이나 쩍쩍 씹고 다니는 그 친구들에게 폼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 폼에는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마치 짱구라는 이름처럼. 극 중 인물의 이름 하나가 얼마나 많은 극적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도 작품을 보는 소소한 재미중의 하나였다. 엉뚱하고 고집스럽지만 순수한 주인공의 이름 못지않게 영화 작명도 기막히다. 영화의 제목 바람은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짱구가 원하는 것, 둘은 짱구가 느끼는 것. 짱구의 고등학교 3년은 바람처럼 흘러갔고, 짱구는 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짱구와 그 패거리의 캐릭터 면에서의 매력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몇몇 전문가들이 학원 액션물 품행제로’, ‘말죽거리 잔혹사’, ‘싸움의 기술등을 철학이 없는 폭력 미화 작품으로 비판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후 나온 이 영화가 얼마만큼 충무로 액션 영화에 발전을 가져 왔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은 학원 액션물뿐만이 아니라 복합장르 영화로서 얼마만큼의 성과를 얻었다. 얼마 전에 한국형 하이틴 영화 써니가 돌풍을 일으켰다. 영화의 주 향유 층이 고학력 여성이었던 시대에서 전 국민으로 바뀐 오늘날, 우리 영화계에 하이틴 영화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바람은 남자들의 하이틴 영화, 더 나아가 교복을 입고 명찰을 달고 다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의 하이틴 영화다. 그때를 그리워하며 오늘날 한반도를 밝히고 있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여, 파이팅!

바람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그래서 성장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글러브’, ‘여행자등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 작품들과 다르게 메시지 전달보다는 작품 내적 재미를 추구하는 바람은 그래서 상영시간이 빠르게 느껴진다. 바람 한 줄기 휙 지나간 것처럼.

바람처럼 흘러간 짱구를 연기한 정우의 놀라운 흡입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실화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그저 그런 저예산 독립영화로 평가받을 수도 있었던 이 작품을 관객평점 9점 이상의 성적을 올리며 충무로의 미래를 밝혔다. ‘워낭소리’,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불청객들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작품이라고 말하기에 무리가 없다.

정우, 이성한의 한국형 액션 라인은 류승완, 류승범 형제의 액션 라인에 필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호평 전에 이성한 감독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관객들이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 극장을 찾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슷한 스타일의 감독인 류승완, 양익준이 보여주는 삶의 애환과 서민에 대한 애정, 사회 참여적 성향 등의 철학적 깊이를 이성한도 그만의 스타일로 갖게 되길 희망한다.

올해 가을 개봉 예정인 그의 차기작 히트에서 그는 정우와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며 우리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할지 기대된다. 왜냐고? 나는 개인적으로 사색의 숲에 부는 가을바람을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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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댄스타운

영화 비평 2020. 10. 26. 16:24

댄스타운(전규환, 2011)2011년 미국의 댈러스아시안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할 만큼 무산일기처럼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이다. 영화는 북한이탈여성을 두고 벌어지는 다양한 착취와 억압을 건조하게 다루고 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주요 갈등은 다음과 같다. 북한에서 살던 리정림(라미란 분)은 한국산 성인 비디오를 봤다는 이웃의 밀고로 탈북을 택한다. 그렇게 찾은 남한에서 그녀는 북에 두고 온 남편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적응해가려 한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친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친절한 얼굴을 한 국정원 직원(주유랑 분)CCTV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우연히 알게 된 경찰(오성태 분)은 혼자 사는 그녀에게 음흉한 의도로 접근하며, 가끔씩 찾아 돌봐주고 있는 장애인(이준혁 분)과의 관계에도 어느 순간 균열이 생긴다.

영화 속 자유와 민주의 나라라고 말하는 한국에서 북한이탈여성의 인권은 없었다. 국가기관의 비공식적 감시가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합법성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러한 영화 속 국정원 직원 속 모습은 디아스포라에게 닫혀있는 우리 사회의 폐쇄성을 보여주고 있다. 경찰 역시도 자신의 공권력을 부당하게 활용하여 리정림을 강간하는데, 배제된 자들에 대한 국가의 폭력을 경찰의 강간으로 전치시켜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북한이탈남성과는 달리 북한이탈여성들이 성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북한이탈주민이라고 하는 소수자집단에서 다시 소수자집단으로 전락하게 되는 북한이탈여성의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데, 같은 소수자라고 할 수 있는 남성장애인이 자신의 자살을 막으려던 리정림에게 저지른 성범죄는, ‘소수자집단 속의 여성이라고 하는 디아스포라 내의 여성문제를 표면화시킨 장면이었다.

북한이탈주민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가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데에 반해 북한이탈여성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댄스타운은 그 소재면에서도 여타 다른 영화들에 비해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욕망이 배재된 채 그저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듯한 리정림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북한이탈주민을 지나치게 무력하게만 바라보게끔 작동할 수 있다는 염려가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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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산일기

영화 비평 2020. 10. 26. 16:22

무산일기(박정범, 2011)는 북한이탈주민 전승철씨가 모델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영화 무산일기의 주인공 전승철(박정범 분)은 북한이탈주민이며 남한사회의 최하층으로 살고 있다. 그는 취업하기위해 면접을 보러 다니지만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직장을 구하기가 어렵다. 설혹 취업을 해서 열심히 일하더라도 그를 고용한 사람들은 그가 남한사회가 요구하는 부지런함이라는 덕목이 갖춰지지 않은 게으른 탈북자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한다. 함께 사는 동거인 친구를 포함해 남한사회에 적응하려는 다른 영악한 북한이탈주민들과도 그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전승철이 친구로 원하는 인물은 북한이탈주민이 아닌,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숙영(강은진 분)이다. 하지만 전승철은 숙영을 근처에서 관찰만 할뿐 매번 말도 붙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다가 그녀가 그녀 아버지의 노래방에서 도우미 아가씨로 일 하는 것을 알게 된 승철은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하지만 숙영은 그를 불편이 여기고 해고한다. 전단지 붙이기 등 모든 일에서 해고당한 승철은 변모하기 시작하여 전단지를 모두 떼어버리고, 자신을 때리던 다른 업소 사람들과 맞서 싸운다. 또한 친구의 돈을 자신을 꾸미는 데에 쓰고, 자신이 키우던 강아지가 죽은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숙영을 만나러 다시 노래방으로 간다.

이 영화는 제3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2011) 신인감독상 등 국내외 주요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이다. 북한이탈주민들이 한국사회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으며, 국경의 남쪽같은 사회적 통찰이 없는 신파나 로맨스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역시 북한이탈주민을 바라보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 주인공 전승철에게 투영돼 있다는 것이다. 전승철=북한이탈주민=못사는 나라=순수하고 착한사람, 한국인=자본주의=잘사는 나라=영악하고 나쁜 사람으로의 도식은 영화 후반부의 전승철의 변모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이중구조의 틀을 깨부수지는 못한다.(전승철은 착한사람에서 영악하고 나쁜 사람이 됐을 뿐이다.)

더불어 나쁜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은 한국인이 아닌, 북한이탈주민인 전승철의 친구 경철(진용욱 분)’이다. 경철은 극 중에서 북한이탈주민에게 사기를 치고, 때때로 순수한 전승철을 무시하거나, 전승철이 키우던 강아지를 내다버리는 등의 생명을 경시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순수하거나, 악인이거나의 이중적 구조로 북한이탈주민(이주노동자를 포함한 디아스포라 전체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을 바라보는 우리 안의 모순이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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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안판석, 2006)은 총제작비 70억 원으로 당시의 한국영화규모를 놓고 봤을 때는 거액이 투입된 대작이었지만, 전국관객 30만 명으로 흥행에는 참패했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국경의 남쪽의 탈북자라는 소재의 이미지가 아직은 대중성이 없는 것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국경의 남쪽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선호(차승원 분)는 평양의 평범한 중산층으로, 전쟁기념관 안내원인 연화(조이진 분)와 연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한에 살아있는 할아버지와 김선호의 가족이 연락을 주고받은 것이 적발되어 그의 가족은 신분의 위협을 느끼고, 탈북 하여 남한에 정착한다. 남한에서 김선호는 북에 있는 연화와 접촉을 시도하다가 사기를 당하고, 남한에서 만난 경주(심혜진 분)와 결혼하게 된다. 한편, 연화는 김선호와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탈북 하여 남한에 정착하지만, 김선호의 상황을 알게 되고, 다른 남한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줄거리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국경의 남쪽은 인민들이 탈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북한의 현실을 고발하는 정치드라마도,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겪는 고단한 삶을 드러내는 사회드라마도 아니다. 신파적 소재의 멜로드라마일 뿐이다. 이러한 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북한이탈주민의 현실을 너무 낭만적으로 미화한 것은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랑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 것은 평가받을만 하지만, 현실과 괴리된 채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한다는 내용의 판타지는, 북한이탈주민들에게는 생사의 갈림길과도 같을 탈북을 상업적으로만 이용한 것이다.

더불어 아쉬운 것은 극에서 드러나는 연화, 경주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다. 특히, 연화의 경우를 살펴보자. 연화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데리러 오겠다는 선호의 말만 믿고, ‘탈북에 성공한 후 한 번도 연락이 없던선호를 만나기 위해 가족들을 두고 혼자서 탈북을 감행한다. 남한에 정착하고 선호가 이미 결혼했다는 것을 인지한 상황에서도 그가 운영하는 식당을 찾아가고, 그와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등 지고지순한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한국인들의 관념 속에서 북한 등 아시아의 저개발국가 여성이 순수하고, 순종적인 여성으로만 그려지고 있는 것을 상기한다면, 결과적으로 국경의 남쪽이 이와 같은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기여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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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원칙주의

-나의 독재자 리뷰

 

메노키오.

민중사를 대변하는 카를로 진즈부르크의 대표작 [치즈와 구더기]16세기 이태리를 배경으로, ‘메노키오라는 방앗간 주인의 종교재판을 다룬다. 이단으로 고발당한 메노키오는 수도사와의 심문에서, 종교권력의 부패와 교육 불평등을 비판하고, 나아가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고 주장한다. 투옥된 메노키오는 결국 자신의 종교적 잘못을 인정하고, 아들의 석방 노력으로 방면된다. 가톨릭의 교리에 굴복한 것처럼 보였던 메노키오는, 다시 침묵을 강요하는 사제들을 비난하기 시작하고, 치즈와 구더기가 만들어지듯, 신과 천사가 만들어졌다는 독창적인 천지창조설을 이웃들에게 말하고 다닌다. 결국 또다시 고발된 메노키오는 투옥과 고문을 과정을 거쳐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메노키오를 지배한 것은 가톨릭의 교리와 죽음의 공포가 아닌, 신념에 따라 할 말은 한다는 자발적인 원칙이었다. 필자는 이처럼 타인의 강요 없이 스스로 만든 원칙을 고수하는 이를 자발적 원칙주의자라고 명명한다.

 

김성근.

이해준 감독의 [나의 독재자]에는 무명배우 김성근이 등장한다. 김성근의 꿈은 연기를 통해 당당한 아빠가 되는 것이지만, 문제는 김성근이 연기를 못한다는 것에 있다. 아들을 관객으로 초대한 연극에서, 김성근은 대사 한마디 제대로 내뱉지 못한다. 낙심한 김성근에게 1972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가상회담의 김일성 역이라는 기회가 찾아온다. 중정의 고문에도 끝끝내 역할을 뺏길 수 없었던 김성근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연기를 잘하는배우로 거듭난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은 무기한 연기되고, 중정의 가상회담팀도 해체된다. 역할에 너무 몰입했던 김성근은, 훈련이 끝났어도 스스로를 김일성이라고 믿는다.

엄마 없이 자라는 아들에게 멋있는 배우이자 좋은 아빠이고 싶었던 김성근의 간절함이, 스스로를 일상의 생각과 행동마저 김일성이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한 김성근의 원칙은 정신이상의 과정을 거쳐, 급기야 월북을 시도하게 만들고, 그 일을 수습하느라 고입시험마저 볼 수 없었던 아들은, 괴물이 된 김성근을 원수처럼 원망한다. 김성근 역시 스스로 부여한 규율을 고수하다가, 삶의 존재이유였던 아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 원칙주의자인 것이다. 하지만 김성근에게 자발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가상회담팀을 이끌던 중정의 오계장의 말이 계속 귀에 걸린다.

난 네가 김일성인지 아닌지 관심 없어 이 새끼야. 내가 김일성이라고 하면 넌 그냥 김일성이야, 새끼야.”

 

김태식.

김성근에게는 아들 김태식이 있다. 아빠에게 가장 아끼는 딱지를 선물하고, 중정에 감금 돼 있다가 돌아온 아빠를 울며 끌어안던 김태식은, 다단계사원으로 성장한다. 돈이 목숨이라며 열변을 토해내는 김태식에게는 정신이 이상한 아빠도,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된 내연녀도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김태식에게 쌓이는 것은, 돈이 아닌 빚이다. 빚을 청산하기 위해 아빠 소유의 집이 필요했던 김태식은, 정신이 나간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된다.

돈만을 추구하기로 마음먹을 수밖에없었던 엇나간 원칙주의자에게 효도, 사랑, 자아실현이라는 가치는 수단일 뿐이다.

 

()자발적 원칙.

메노키오는 공상 속에서 자신을 순교자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메노키오에게 변질된 이단은, 오히려 재판관들이었다. 재판관들을 향해 자신의 철학을 역설하던 메노키오의 자발적 원칙은, 오백년 후 진즈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라는 책으로 돌아왔다.

 

1994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드디어 김성근은 가상회담의 김일성으로, 청와대라는 무대에 오른다. 김성근에게는 리허설도 대본도 필요 없었다. 자신이 김일성보다 더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처럼 김일성의 사상을 역설하는 김성근에게 불쾌해진 대통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김성근은 아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던 연극 [리어왕]의 대사를 연기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날 카메라를 통해 아빠의 연기를 지켜보는 김태식도 울고 있었다. 며칠 후 아빠가 죽고, 집마저 잃은 김태식에게 남은 것은 사랑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내연녀를 찾아가던 순간, 돈만을 추구하던 김태식의 원칙은 사라졌다.

결국 김성근·김태식 부자의 비자발적 원칙이 사라지는 순간은, 원칙 깊은 곳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경험했을 때이다.

 

나의 독재자.

혁명. 자급자족. 충성.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예술. 자본주의. 국가.

나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누구의 목소리일까.

당장 총살 시키라. 수령은 아버지야. 돈은 목숨이야. 인민은 인민답게. 미제 물건 치우라.

그 목소리가 지시하는 원칙은 자발적인가.

위태롭던 김성근·김태식 부자가 청와대를 나와, 분당을 지나, 남해로 내려갔다. 아빠는 죽었지만, 아들은 태어날 것이다. 김태식이 아들에게 보여줄 연기는 리어왕일까, 김일성일까.

 

그것이 꿈이라면 다시는 깨지 않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나의 독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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