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에 해당되는 글 17건

  1. 2020.10.26 여배우를 위한 변명
  2. 2020.10.26 목소리의 형태
  3. 2020.10.26 영화 25시
  4. 2020.10.26 자본주의
  5. 2020.10.26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6. 2020.10.26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7. 2020.10.26 국가폭력과 인권 -영화 남영동1985

충무로의 젊은 여배우 기근 현상이 뚜렷하다. 90년대 후반 심은하-고소영-전도연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교차적으로 장악했던 트로이카 시기 이후, 연기력과 티켓 파워를 함께 갖춘 젊은 여배우들이 동시에 활약한 시기는 없다. 씨네21의 표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몇몇 여배우들의 농밀한 페르소나는, 몇 년 후 어김없이 책장의 어두운 칸으로 자리를 옮겼고, 대중의 온기 가득한 손은 남성 배우와 스타 감독의 차지가 됐다. 마지막까지 여배우 곁을 지키리라 믿었던 삼촌들역시 소녀시대의 젖가슴 사이에, 김연아와 손연재의 가랑이 사이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필자의 눈에는 잊힌 여배우들의 이 더욱 크게 보인다.

 

김소영은 남성들은 더 본질적인 여자, 따라서 극복 가능성이 원천 봉쇄된 여성들과의 만남으로 보다 바람직한 남성성을 회복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주장을 빌려, 충무로 여배우 기근현상의 속살을 들춰보자. 남성의 뜨거운 시선이 스크린에서, 여성 아이돌 그룹과 스포츠스타들에게 전면적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부터이다. 이 시기는 신권위주의 체제인 MB정권의 등장, 불평등의 심화, 심지어 가정 내에서조차 드러나는 경쟁 등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억압기제가 서로 맞물리며, 스스로를 도태된 삼포세대로 명명하는 사회적 약자 계층의 광범위한 확산을 가져온 때이다. “소녀들을 향한 삼촌세대의 증가와 동시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의 스크린 속 여배우들은, 상처받은 가학적 남성 관객이 기대하는 극복 가능성이 원천 봉쇄된소녀의 모습에 충실하지 않았다. 핫팬츠를 입고, “오빠, 소원을 말해봐.”라고 말하는 수동적이고 자학적인 소녀도 있었지만, 필자의 뇌리에는 자신과 딸을 학대하던 남편과 시어머니를 흉기로 내리치는 김복남(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 딸과 함께 중산층 가정의 집을 빼앗으려는 주희(숨바꼭질, 2013) 등 남성보다 더 가학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뚜렷하다. 나아가, 납치돼 아저씨만을 기다리던 진짜 소녀김새론(아저씨, 2010)은 자신을 괴롭히던 할머니와 의붓아버지를 죽게 만들거나, 감옥에 가게끔 어른들을 속이는 영악함을 가진 소녀로 성장한다.(도희야, 2014)

 

올해 개봉했던 문제작도희야를 좀 더 들여다보자. 도희를 도와주는 파출소장인 영남 역시 여성이다. 영남은 레즈비언이라는 성정체성으로 인해, 지방으로 좌천됐다는 점에서 도희와 소수자적 특성을 공유하며, 도희와 자연스러운 연대를 통해 마을(사회)의 부조리한 이데올로기에 대응한다. 도희와 영남이 기존의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들과 가장 뚜렷하게 대비되는 지점은, 비자발적 억압상황을 초탈하거나 오히려 즐기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특히, 도희의 경우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매일 밤 방파제에서 춤을 춘다. 잔혹함과 평화로움, 유머와 고통이 도희를 동시에 교차하며, 한국 여성 캐릭터의 새로운 진화를 보여준다.

 

이처럼 한국 여성영화의 성장은, 역설적으로 젊은 여배우 기근 현상의 전후 맥락이다. 전통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 관객에게 의존했던 영화산업임에도 불구하고, 1960-90년대 중대한 여성문제였던 노동 착취는 한국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없었다. 문화 경합의 과정의 승자가 여성을 억압하고자 하는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 여성권에 대한 대중의 보편적 이해의 확산은, 고무신 관객, 아줌마 관객, 손수건 부대 등 스크린 외부에 남아있던 여성 관객 비하 용어들마저 사어로 만들었다.

 

이제 주사위는 다시 관객의 몫이다. 충무로의 여배우들은 도태된 적이 없다. 그들은 시대가 원하는 여성 캐릭터를 훌륭히 표현했다. 순수와 섹시라는 양자택일의 유형에서 한 단계 발전했다. 필자는 더 잔인하고 악랄한 여배우와, 그녀를 노려보며 야무지게 팝콘을 깨무는, 배우보다 무서운 관객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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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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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형태

영화 비평 2020. 10. 26. 15:52

영화 목소리의 형태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작품으로 집단 따돌림의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 잘못을 회복하는 이야기이다. 소년 이시다 쇼야는 청각장애 소녀 니시미야 쇼코가 전학을 오자 호기심을 보이지만, 관심을 표현하는 데 서툴어 쇼코의 장애를 놀리기 시작한다. 결국 쇼코는 아이들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채 전학을 가고, 쇼야는 집단 괴롭힘 가해자로 낙인찍혀 역으로 괴롭힘을 당한다. 그 후 5년이 지나 여전히 외톨이인 고3의 쇼야는 삶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 결심한 후 마지막으로 쇼코를 찾아가 사과한다.

우리는 모두 불안정한 인간이다. 장애인 쇼코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쇼야도 마찬가지다. 쇼코가 최종적 피해자가 아니듯, 쇼야도 최종적 가해자는 아니다. 등장인물 모두 가해와 피해 사이 어디쯤에 있고, 그것은 관객인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작품이 방관자나 전지적 관찰자의 시선보다 공평하며 참여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연약하며 때로 비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관계를 절연하는 것보다는 그 연약함과 비겁함을 껴안으며 소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작품 속 목소리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흔들리는 열차에 쏟아지는 석양의 잔해, 햇살과 바람 사이에서 흩날리는 벚꽃, 곡식이 무르익는 소담한 시골길보다 아름다웠던 것은 목소리였다. 목소리 깊은 곳 마음의 진정성은 어떤 울림을 통해 쇼야아게, 쇼코에게, 우리에게 전달됐고, ‘두려움을 넘어선 소통<목소리의 형태>가 관객에게 마지막까지 전한 굳센 메시지일 것이다. 아이들은 관용과 사랑을 배우면서 그렇게 어른이 됐다. 그 시절 우리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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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5시

영화 비평 2020. 10. 26. 15:13

어릴 적 대마초를 팔던 몬티는 소방수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지만, 마약 밀매 범이 된다. 집안에 숨긴 마약이 발각돼 검거된 몬티는 보석으로 풀어준 아버지 덕분에 일주일간의 자유를 가진다. 7년의 수감생활에 대한 두려움, 그 후에 전과자로서 살아가야 할 길이 지금부터 걱정인 그에게 세상은 절망뿐이다. 게다가 자신의 범행 사실을 경찰에 알린 사람이 연인이자 동거하고 있는 내추럴일 것이라는 소문에도 시달린다.

우리 모두는 하루 24시간을 살아간다. 그리고 내일 다시 24시간을 산다. 24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는 어제 자신이 산 24시간에 달려있다. 몬티는 감옥으로 가기전의 24시간동안 모든 걸 정리하려 한다. 아버지와 저녁식사를 하고, 아끼는 애완견도 친구에게 맡기고, 친구, 애인과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그러나 그 24시간에는 여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감옥으로 간 뒤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여전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친구들에 대한 의구심 등 즐거운 24시간을 채우기에는 버거운 번민들이 가득하다. 그가 화장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분노하는 모습도 나온다. 자신이 아닌 모든 외부의 것에 대해 혐오하기 시작한다.

몬티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미래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몬티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한 여학생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소심하고 인기 없는 고등학교 교사다. 다른 친구는 잘 나가는 증권 거래사지만, 그의 삶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몬티의 애인에게 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관이 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을 바탕으로 모든 관찰되는 사실에 대한 주관적인 견해를 갖는다. 그리고 그 주관적인 견해에 부합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몬티처럼 스스로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도전을 보이는 다른 견해를 누르고 싶은 욕망,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욕망은 꿈틀대기 시작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억지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몬티의 24시간에는 어제의 불행을 막지 못한 우리의 망연자실함과, 우리에게 벌어진 끔찍한 사건에 대한 도발적인 분노가 있다. 우리는 내일 어떤 시간을 맞이하게 될까.

25시는 테러 이후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첫 번째 영화라고 한다. 어쩌면 감옥행을 앞 둔 한 사내의 지극히 사적인 경험은 테러로 황폐해진 미국의 집단정서 속으로 편입되고, 헤어날 길 없는 이 혼란스러움은 골을 더해가는 인종문제, 그리고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현기증 나는 탐욕 속으로 삼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몬티는 그의 24시간을 보내고, 그에게 엿 같은 7년의 시간을 안겨줄 교도소로 아버지의 차를 타고 간다. 그때 아버지는 그에게 도주를 제안한다. 철저히 자신을 숨기며 예전의 기억은 모두다 마음속에 비밀로 홀로 간직한 채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하지만 그 제안도 해피엔딩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엉망이 된 얼굴로 교도소로 향하는 그의 모습은 이미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과거의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지나간 어제의 족쇄에 묶여 끌려가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하는가, 나에게 25시로 향하는 탈출구가 주어지길 원하는가. 25시는 꿈 혹은 잔인한 시간일 뿐, 사람에게 주어지는 건 24시간뿐이다. 다시 돌아와 남는 건 현실의 잔인함뿐인 것이다. 언젠가 후회할 순간이 돌아와 새로운 25시를 갈망하지 않게, 주어진 24시간을 나름대로 충실하고 정직하게 보내야 한다. 그것이 거울 앞에 선 나를 보는 것이든, 거리를 걷는 수많은 다른 인종과 마주하는 것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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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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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영화 비평 2020. 10. 26. 15:11

자본주의(Capitalism):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

 

칸영화제 황금곰상의 주인공이자, 2007식코로 전국적인 의료보험 체계가 없는 미국 사회의 병폐를 혹독하게 꼬집었던 마이클 무어는 이번에는 좀 더 영역을 근본적으로 확대해서,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영화 속에서 시작한다.

빵과 서커스로 우민화 정책을 국시로 삼은 고대 로마시대를 다룬 개론을 통해 영화자본주의는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전 월가에서 주도한 파생상품에 의한 재테크 실패와 서브 프라임 위기로, 수십 년 동안 살아온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은행과 각종 대출업체에게 길거리로 내몰리는 미국 보통 사람들의 현 모습을 마이클 무어는 카메라에 담담히 때로는 서럽게 담아낸다.

 

영화 속에서 타인의 불행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듯, 월가는 은행에 저당 혹은 압류된 집들을 찾아내 헐값에 사들인 후에 비싸게 되파는 비윤리적인 짓을 서슴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이러한 행태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게 바로 물신만능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윤추구라는 규제되지 않는 괴물의 본질인 것일까?

 

자유기업, 경쟁 그리고 이윤추구라는 자본주의 가치로 무장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래에 자신의 경쟁자가 되는 독일과 일본이 패전의 폐허를 극복하는 동안 세계시장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번영을 구가한다. 이어서 미국은 레이건 집권 이후 30년 동안, 회사의 고위경영진은 보통 노동자들에 비해 엄청난 차이의 고 급여를 받는 차별적인 임금체계를 강화시키고, 빈부간의 격차는 측정불가 수준으로 치닫는다. 미국을 대표하는 GM 같은 회사들이 잇달아 부실경영으로 도산하면서, 그에 따른 대량해고로 일자리를 잃은 미국의 수백만 가정들은 사회에서 표류하기도 한다. 철저한 빈익빈부익부사회의 도래 인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체제는 국가의 기능을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민간 기업에 위탁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는 실례로 펜실베이니아의 사례를 든다. 펜실베니아에서는 십대 청소년들이 쇼핑몰에서 싸움을 하고, 미니홈피에 학교 관리자를 욕했다는 단순한 이유로 소년원에 보내진다. 이 소년원은 800만 달러를 투자한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곳으로, 전액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인데 투자비를 상회하는 막대한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행태를 보여야 하는 것이다. 소년원 내에서도 이들은 청소년들의 교화보다는 이윤추구를 목표로 한다. 더불어 항공기를 조종하는 조종사들이 박봉과 빡빡한 일정에 시달리기 때문에 승객들이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도 마이클 무어는 지적한다.

 

월마트나 미국 내 굴지의 은행들은 그들의 피고용인에 대한 생명보험을 들고, 수혜자를 기업으로 설정해서 그들이 죽었을 때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도 한다. 이런 보험을 무섭게도 죽은 일꾼 보험이라고 하는데, 인간을 오로지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보는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월가의 경영 천재들이 개발해낸 금융파생 상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적에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상품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 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상황도 관객들은 마주하게 된다. 이처럼 거의 사기 수준인 대출업계의 농간에 넘어간 미국 중산계급 노동자들이 집을 잃고 길거리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골드만삭스와 앨런 그린스펀으로 대변되는 끝을 모르는 탐욕의 주범 월가는, 세계금융위기 속에서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7,000억 달러에 달하는 공적 자금을 받는데 성공한다. 아무런 규제도 없이 그렇게 공적 자금을 통해 극적으로 부활한 금융기관은 어이없게도 자신들만의 보너스 잔치로 국민의 공분을 사는 파렴치한 행태까지 보인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골드만삭스가 주도한 금융쿠데타에 대해, 미국의 일단의 양심 있는 의원들이 의회에서 소신 발언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뉴스 필름과 인터뷰를 통해 월가의 추악성을 밝힌 마이클 무어는 현금 트럭을 몰고 의회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금융기관을 돌며 공적자금의 회수를 시도해 보지만, 건물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냉대를 받고 쫓겨난다.

 

하지만, 2008114일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미국사회는 극적인 반전이 이뤄지기 시작한다. 지역 보안관은 더 이상, 은행의 가혹한 압류정책을 시행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국회의원은 설사 자신의 집이 압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버티고 저항할 것을 주장한다. 자각한 시민들의 도움으로 빼앗긴 집에 들어가 다시 살 기회를 잡는 모습을 영화는 보여주기도 한다. 시카고의 어느 공장에서는 경영부실로 대량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저항과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도 한다.

 

영화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자들이 복음처럼 떠들어 대는 자본주의가 과연 민주주의 대의에 적합한가에 대해, 나는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마이클 무어가 만난 가톨릭 사제들은 자본주의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한다는 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다. 자본주의는 공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정반대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2006년 시티그룹이 작성한 비밀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더 이상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1%의 부자들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금권주의 국가라고 선언한다. 상위 1%의 부자들이 하위 95% 계층의 부와 비슷한 상황은 빈부의 격차를 벌이고, 이런 상황은 영속되리라는 전망도 함께 내놓았다. 그들은 하위 계층의 부의 공정한 분배요구와 민주주의의 근간인 일인일표제를 금권주의 유지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았다. 거의 모든 사회의 부를 쥐고 있는 사람이나, 급여가 빤한 월급쟁이나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는 이러한 보편적 평등이 불만일 게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가진 자본을 이용해서, 규제를 철폐하고 유리한 법률을 만드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래도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영화에서 나와, 현재의 미국을 바라보자. 오바마 집권이후 미국역시, 경제상황은 암울하다. 부시 재임시절 이라크 전 및 각종 전쟁에 쏟은 국방비와 지속적인 세금 감축으로 이미 국가 재정은 엉망이었던 것이다. 실업률은 그 증가속도가 감소했다고는 해도 지속적으로 오르는 추세에 있고, 영화에서 보듯이 주택압류를 당하는 서민들도 아직 많다.

 

역사의 제국들과 현재의 미국을 비교해볼 필요도 있다. 과거 역사속의 제국들 역시 돈이 있는 곳에 정치가 있었고, 정치가 있는 곳에 늘 돈이 있었다. 일례로, 유럽에서는 십자군 원정 때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 원정으로 목숨을 잃거나 재산을 잃었을 때 주로 무역상들은 새로운 교역로 확보로 이득을 보게 되었고, 전쟁자금이 필요했던 왕실에서는 이들의 도움을 받고 그들에게 작위를 내려 신흥 귀족으로 만들었다. 문제작 쑹홍빙의 화폐전쟁을 참고한다면, 20세기 두 번의 세계전쟁에서도 군비를 댄 금융가들이 이득을 보았으며, 전후 정치에까지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자본주의를 유사한 한국의 자본주의와 비교해 볼 필요도 있다. 한국은 산업화시대 그리고 지식정보화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모두가 잘 살아보세, 선진국 진입이라는 자신감과 열정에 불타올랐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대졸 젊은이로부터 은퇴하는 베이비부머 세대까지 사회전반에 걸쳐 국민 모두가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 미국 못지않게 국민경제의 기반을 흔드는 양극화가 국가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국과 한국 모두 현 상태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 아닐까한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결코 대안이 없는 것일까? 감독은 그 대안으로 협동조합 형식의 기업 운영형태를 제안한다. 협동조합은 농산품의 가공·판매, 다양한 장비와 원자재의 구매, ·소매업, 발전소, 은행업, 주택건설업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운영되어오고 있다. 미국에서 coops로 약칭되는 현대적인 소비자 협동조합은 일련의 조직규범 및 업무원칙을 세우고, 이를 광범위한 분야에 적용한다. 주요원칙으로는 개방적인 회원제도, 민주적 관리, 종교적·정치적 불평등의 제거, 공정한 시장가격의 유지, 교육을 위한 수익금의 적립 등이 있다.

이러한 협동조합 모델은 감독이 비판한 미국의 현재에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적대감을 줄이고, 해고를 줄이고, 자본주의보다 민주주의가 더 큰 미국을 만드는 데 큰 힘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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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칠레하면 어떤 생각을 먼저 할까? -칠레 자유무역협정? 칠레산 와인? 아니면 길쭉하게 생긴 칠레의 국토? 지구 정반대의 나라?

사실 나 역시 칠레 역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세계최초로 민주주의 선거로 세운 사회주의 국가가 칠레라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고, 그들의 혁명이 광주민주화운동, 혹은 한국 현대사와 너무 닮아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사는 미국 CIA의 군부 쿠데타 지원과 피의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에 맞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염원하는 민중의 항쟁이 선연한 핏자국으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이자 희망의 역사일 것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비극적인 나라 중의 한 곳을 뽑으라면 아마 칠레라는 대답이 다수를 차지하지 않을까.

 

칠레 혁명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1970년 최초로 칠레에서 대통령선거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4번만의 도전 끝에 성공한 살바도르 아옌데. 세계적인 평화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단일화에 성공한 그는 칠레국민에게 진정한 민주국가를 수립하고 진정한 칠레의 최초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사람이다.

 

칠레는 구리가 세계에서 가장 매장이 많이 돼 있는 곳 중 하나인데, 미국계 회사들이 이를 독점해 칠레 민중에게 돌아가는 이득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통령에 당선된 아옌데 정부는 구리와 기타 산업들을 국유화 하며 토지개혁 등 여러 개혁을 시작한다. 자신의 기득권이 무너지는 꼴을 못 보는 우익세력과 자본가 세력은, 미국과 힘을 합쳐 아옌데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구리재고를 풀어 구리 값을 폭락시키는 등의 경제봉쇄 정책을 펴고, 우익세력들은 주유소, 병원, 상점 등이 파업하게 하는 등 칠레의 경제를 계속 흔든다.

모든 책임은 아옌데 정부에게 돌아갔고 민심도 흔들리고 군부도 흔들리는 가운데 아옌데는 피노체트를 믿고 그를 3군 지휘관으로 임명하지만, 그는 미국과 우익세력을 등에 업고 3주 만에 쿠데타를 일으킨다.

작전명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가 라디오에서 계속 울려 퍼지고, 군은 대통령이 궁에서 나와 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그는 끝까지 대통령궁에서 나오지 않고 국민들을 향해 마지막 연설을 한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박해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저 상황에서 아옌데처럼 저렇게 의연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국가와 나의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내던질 수 있을까?

미국의 9.11이 제국의 침략과 그에 대한 항거에서 일어난 불상사라고 읽을 수 있다면, 칠레의 9.11은 파시스트들이 민중의 힘으로 탄생시킨 지도자 아옌데를 제거하고 소수 자본가들의 특권을 연장하기 위한 반동의 불상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 이상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지금, 끝까지 총을 들고 저항했던 아옌데는 칠레인들의 가슴 속에 잊을 수 없는 영웅으로 자리매김 돼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우파라고 칭하는 국내의 부패한 기득권에게 묻고 싶다. 우파는 최소한 도덕적의고 타국의 횡포에 분노하는 민족주의자여야 하지 않는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는 비도덕적이고 자신의 기존 이익을 위해 단 한치도 양보하지 않은 채 최소한의 자존심도 내버리는 것을 단순히 우파라 칭하고 있지는 않은가? 김구 선생 같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우파가 아니겠는가?

1973년 산티아고에는, 1980년 광주에는 비가 아니라, 피가 내렸고 눈물이 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배반한 채 수구기득권세력의 인식과 논리에 동조하고 있지는 않는가? 무한한 상상으로 행동을 해보자. 꿈은 꾸는 자의 특권이고,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공화국의 모든 시민들이 물질적 복지와 정신적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역사적 임무일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언젠가를 울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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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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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영화를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잭 니콜슨의 환상적인 연기는 이루 말 할 수 없었으며 밀로스 포만의 영화중에 최고의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정신병원이란 곳을 더 잘 알게 되었고 정신병자들이 왜 정신병원에 있는지, 왜 정신병자들이 계속 정신병자의 상태로 남게 되는지 이 영화는 그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정신병원을 통해서, 우리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잭 니콜슨은 감옥에서 더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해 일부러 미친 척 하여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정신병원의 정신병자들 사이에서 리더가 되어 정신병원 간호사가 환자들에게 하는 짓을 최대한 막으려고 소란을 피우며 이 병원의 기존 틀을 바꾸려고 한다.

잭 니콜슨은 이 병원에 온 이후로 오히려 정신이상자가 되어간다. 정신병원이란 바로 그런 곳이고, 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날 약을 먹고, 음악을 듣고,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없고, 똑같은 생활만을 유지해야한다. 그것도 정신병자들끼리만. 병원에 온 잭 니콜슨은 병원환자들과 친구가 되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닫는데 환자들은 일부러 자신처럼 정신병원에 지원해서 온 것이고, 일부러 자신들을 정신병자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억지로 자신의 수준을 낮추며 정신병자처럼 행동한다. 정신병원을 탈출해 환자들과 함께 낚시를 하는 장면은 거의 정상인이나 다름없이 보였다.

정상인처럼 낚시를 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젊은 나이에도 병원 안에서 썩고 있는 그들을 보며, 잭 니콜슨은 참지 못했다. 그렇게 정신병원에서 탈출을 꿈꾸던 잭 니콜슨은 환자들 중 추장이었던 한 환자와 함께 정신병원을 탈출하려고 하지만 추장은 정신병원을 나가려 하지 않는다. 정신병원의 생활이 익숙해지고 정신병원 친구들과 헤어져 세상 밖으로 나가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신병자들은 정신병원 밖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 자꾸만 자신을 낮추고 오히려 더 정신을 이상하게 만드는 병원에서 생활하려 하는 걸까? 무슨 약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매일 먹는 약과 간호사의 치료가 실제로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환자들은 정말 자신들이 꼭 정상인이 되고 말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기는 했던 것일까? 그들에게는 두려운 과거가 있었다.

잭 니콜슨은 병원을 탈출하려 했고 탈출하려는 전날 밤 환자들과 인사를 해야 했는데 그만 잠이 들어 탈출하지 못하고 다음날 날이 밝아온다. 이미 병원에서 많은 일을 저지른 니콜슨은 강제뇌수술을 받아 식물인간과 다름없는 완전한 환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강제뇌수술이다. 완전한 강제뇌수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함께 탈출하자던 잭 니콜슨의 제안을 받았던 추장은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니콜슨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날 떼어놓고 가진 않을 거라고 믿었지. 이젠 같이 가면 돼. 난 자신감이 산처럼 커!"

그리고는 자신을 소중히 생각해주던 니콜슨을 끌어안는다.

"이대로 널 두고 갈수는 없어. 이렇게 놔둘 수는 없어. 나랑 같이 가! 가자."

그리고는 이미 자신이 아니었던 니콜슨을, 그렇게 함께 떠나려고 했던 한 남자의 영혼을 육체에서 꺼내준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강제적인 수술로 인해 육체를 빼앗긴 그 남자의 영혼과 함께 드디어 병원을 탈출하는 것이다.

 

뻐꾸기는 둥지가 없는 새다.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그런데 제목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이다.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어디선가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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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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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덮어두면 곪는다. 곪은 상처는 터지지 않으면 썩은 채 굳어버린다. 역사적 상처도 마찬가지다. 곪아터지지 않고 썩은 채 굳어버려 치유할 수 없는 내상이 되기 전에, 그 상처를 들추고자 한다. -정지영 감독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기억은 그래서 더욱 중요할 것이다. 기억은 때때로 강력한 투쟁이 될 수 있다. 남영동1985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야만적인 정치권력에 대한 기억의 영화다. 용서할 수 없는, 용서해선 안 되는 자들에 대한 기억의 영화이기도 하다.

군부독재시절처럼 사료가 남아있지 않은 시대 혹은 문헌 사료로 파악하기 어려운 문화, 정체성, 숨겨진 사실을 발굴하기 위해서, 본 영화처럼 자전적 수기와 구술사를 활용하는 것은 매우 적절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김근태를 비롯한 고문피해자들의 자기 역사 쓰기는 역사의 자기화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사회적인 것이자 정치적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침묵을 강요받던 이들이 정치적인 삶을 사는 데 필수적인, 성찰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앎을 활용하여 사회의 모순에 대해 건전한 비판과 저항 및 변화를 꾀함으로써 세상을 바로잡는 데 기여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비판적 또는 지성인적 지식인은 여러 사회에서나 오랜 역사과정에서 사회를 정화시키는 청량제 역할을 해오고 있다. 바로 민주주의자 김근태처럼 말이다.

영화로 들어가 보자. 군부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1985, 민주화운동가 김근태는 가족들과 목욕탕을 다녀오던 길에 경찰에 연행된다. 예전부터 자주 경찰에 호출되었던 터라 큰일은 없으리라 여겼던 그는 정체 모를 남자들의 손에 어딘가로 끌려간다. 눈이 가려진 채 도착한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 공안수사당국이 빨갱이를 축출해낸다는 명목으로 소위 공사를 하던 고문실이었다. 이날부터 김근태는 온갖 고문으로 좁고 어두운 시멘트 바닥을 뒹굴며 거짓 진술서를 강요받는다.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잔혹한 고문을 일삼는 수사관들에게 굽히지 않고 진술을 거부하는 김근태는 장의사라 불리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등장하면서 거짓된 진술을 하게 된다.

사전에서 고문은 '범죄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육체적으로 가학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나오는데 실제 영화에서는 고문이란 게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거짓 정보를 주고 그것을 자기가 했다고 강요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다. 특히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정치적 배경이 깔린 고문은 거짓정보를 만들기 위해서 거짓말을 강요하는 차원의 부조리함이 강했다.

영화 속 김근태에게 가해지는 고문은 물고문에서 시작하여 칠성판이라고 이름 붙여진 고문대 위에서 가해지는 전기고문으로 이어진다. 고문의 강도가 점점 높아질수록 나에게 전이되는 고통의 수치 역시 증가했다. 힘에 억압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의 한 장면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 질문했다. ‘나는 고문이 주는 공포심을 떨쳐내고 거짓 진술서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고문이 강해질수록 나는 신음을 토하면서 거짓 진술서를 써가는 김근태의 행동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면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고문의 강도가 증가하면서 김근태는 더욱 고통스러워하지만, 고문을 가하는 자들의 행동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그들에게 고문은 일상적인 업무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장이나 전무 같은 일반 회사의 직급 명칭들이 붙었을까? 애국심이란 핑계로 행해지는 고문 행위들. 그들은 전무의 자리에서, 또는 과장으로서 충실히 고문을 수행한다. 엔딩크레딧과 함께 나온 영상의 고문 피해자들 역시 그들에게 가해진 고문의 공포와 그 기억을 두고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입을 모았다. 그 정도로 고문은 끔찍했고 입에 담기 어려운 악몽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대공분실에서 라디오는 꽤 흥미롭고도 그로테스크한 장치로 보였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스포츠 중계는 그 당시 시대상을 증명하는 지표였다. 또한, 프로야구 중계를 듣는데 집착하는 강 과장의 모습이나 유명우 선수의 타이틀 매치라도 듣자고 화답하는 이근안의 모습에서 비일상적인 행위인 고문과 일상성의 행위인 라디오 청취가 뚜렷하게 대비됐다. 동시에 그 당시의 정권이 사람들의 관심사를 어떻게 돌려놓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라디오는 지금 우리가 그 시대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망각이 만들어낸 유산은 고작 프로야구 내지는 권투 정도이다.

영화 말미 고문을 통해 모든 거짓 진술을 받아낸 이근안은 김근태에게 "그럴 일 없겠지만, 세상이 바뀐다면 그때 날 찾아와 고문하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고 그들은 뒤바뀐 운명으로 재회한다. 무릎을 꿇고 김근태에게 사죄하는 이근안. 그렇지만 고문을 가하면서 이근안이 휘파람으로 불던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고문을 가하게끔 명령한 배후세력이 부는 휘파람은 대선을 앞두고 여전히 우리의 귓가에 들려오고 있다.

 

국가란 무엇이고 법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안정성을 이유로 한 법리는 일면 수긍할 수 있다 치더라도 폭력을 독점한 국가의 인권 유린행위는 어떻게 단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무릎 꿇은 이근안을 보며 느꼈던 것은 국가에 의한 고문은 피해자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가해자 자신의 존엄성과 나아가 인류 전체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87, 서울의 봄과 함께 서울의 고문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우리나라가 아직 고문에서 벗어났다고 보지 않는다. 피의자나 관련자들의 조사과정에서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가하는 모든 사소한 고통, 혹은 형이 확정된 사람들의 형 집행과정에서 일어나는 비인간적인 대우 등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넒은 의미의 고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까? 남영동1985가 남영동2012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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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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