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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26 우에노 치즈코가 말하는 김복남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를 읽고

 

몇 년 전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세계 영화계를 넘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무도라는 외딴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김복남의 남편은 김복남을 육체적으로 학대하고, 딸을 성폭행한다. 김복남은 하루 종일 노예처럼 일하고, 시동생에게도 성적인 학대를 당한다. 하지만 여성이(할머니들) 대부분인 섬사람 모두 김복남이 처한 상황을 외면한다. 그녀의 친구인 해원도 자신과 딸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다. 무도에서 김복남을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녀는 딸을 데리고 섬에서 도망치던 중 딸이 넘어져 죽자, 자신을 학대하고 외면한 모두를 낫으로 베어 죽이는 복수를 감행한다.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는 김복남을 떠올리게 했다. 김복남은 저자가 지적하는 여성혐오의 거의 모든 현상들을 경험한 불운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 책은 그녀의 살인이 몇몇 악인에 의해 일어난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된 담론과 제도 속에서 우리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사건이었음을 증명한다. 이제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를 통해, 왜 김복남이 그러한 핍박받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김복남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보기로 하자.

저자는 먼저 여성혐오를 정의한다. 여성혐오를 성별이원제 젠더 속에서 파악하고 이러한 질서 속에서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남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화 되는 것, 즉 성적 주체의 위치로부터 전락하는 것이다. 반대로 남성화는 한 여자를 자기 지배하에 두는 것으로써 담보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객관화, 타자화, 여성멸시가 여성혐오인 것이다.(p.37) 그렇다면 김복남에 대한 혐오를 넘은 여성들의 방관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김복남을 타자화함으로써 그것을 공유하는 다른 이(힘 있는 남성)들과 동일화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책 중반부에 파멜라 슐츠의 사례를 소개한다. 성폭력 피해자인 슐츠는 가해자 측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기 위해 수감자를 찾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이 저지른 죄는 역겨운 것이지만 그들은 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슐츠는 이들 남성 대부분이 자기평가가 낮으며 스스로 학대당한 경험이 있는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피해자들의 격분을 사면서까지 수복적 사법의 중요성을 설파한다.(p.99) 수복적 사법을 김복남의 경우에도 사용할 수 있을까?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학대를 받은 피해자에게 수복적 사법은 2차 피해가 되지는 않을까? 가해자는 감형받기 위해 참회가 아닌 연기를 하지는 않을까? 기대보다는 우려가 크게 느껴졌다.

저자는 이어서 일본의 다양한 문학 작품을 통해 여성혐오의 현실을 설명하는데, 에토의 작품도 그 중의 하나였다. 저자는 모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딸의 태도를 지적한다. 딸은 내 의사를 전혀 반영시킬 수 없는 남성에게 인생의 조타를 맡긴 채 답답한 어머니가 되는 것 말고는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념하기 때문에 늘 불만스럽다는 것이다.(p.151) 극중 김복남의 딸도 늘 어머니 김복남을 별 이유 없이 불만스러워했는데, 이러한 서술로 딸의 행동에 대한 이해가 가능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사회의 모든 딸들-, 여성혐오는 근대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의 보편적인 감정이 되고 만다.

저자는 어머니의 질투를 설명하면서 이와쓰키 겐지의 주장을 책에 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는 딸을 질투한다. 그렇기 때문에 딸이 행복해지려 할 때마다 어머니는 그것을 방해한다.(p.167) 어머니의 질투가 일정하게 딸에게 투여되고 있는 것은 수긍하지만, 확증편향에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김복남 역시 무도 탈출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남편의 딸에 대한 성폭행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아빠의 딸에 대한 성폭행이라고 표현했지만, 영화 속에서 딸은 아빠를 유혹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저자는, 딸은 자신의 유혹에 아버지가 굴복한 그 순간 아버지를 경멸할 충분한 이유를 손에 넣게 되고, 그때 아버지는 단순한 학대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단순한 근친상간을 넘어 어쩌면 아빠에 대한 딸의 복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반면 저자의 논리가 다소 무리하다고 느낀 부분도 있었다. 먼저 아무리 잔혹한 상상력이라 할지라도 표상의 생산을 단속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부분이었다.(p.95) 이러한 표상이 보상이나 보완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데, 반대로 표상이 계기나 주입이 될 때도 있기 때문에 나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무차별적인 강간 동영상, 학대 동영상, 아동성폭행 동영상 등의 표상도 단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떠한 제한도 없이 생산해내고 소비하는 사회에 남아있을 의식과 담론은 무엇일까? 여자 세계의 암묵적 지식을 이성에게 알리는 행위는 사실 배반 행위이자 반칙 행위라 할 수 있다는 부분도 동의하기 어려웠다.(p.197) 여성이든 남성이든 서로의 지식을 알리고, 소통하고, 이해하고, 잘못된 것은 수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지식 혹은 정보의 공유를 배반 혹은 반칙으로 단정 지어 표현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느껴졌다.

저자의 말처럼 이 세상은 남녀 공학 문화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남학교 문화와 그것에 부수하는 이성애 문화로 이루어져 있다. 남성의 성공을 나타내는 사회적인 지표는 아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하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돈이 얼마나 드는가?’이다. 성의 사회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인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로서 계급적인 산물이며, 한 계급이 다른 계급으로부터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근대 사회의 프라이버시는 오직 강자만을 지키는데 이용될 뿐이다. 이러한 수많은 모순과 억압 속에서, 저자는 여성혐오를 극복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여성이 극복하는 시나리오, 다른 하나는 남성이 극복하는 시나리오다.(p.297) 나와 같은 남성이 여성혐오를 넘어설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신체의 타자화를 그만두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체 및 신체성의 지배자로서의 정신이 주체됨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리고 신체성과 연결되는 성, 임신, 출산, 육아를 여성의 영역으로 여기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신체의 욕망과 그 욕망의 귀결점을 마주 바라보고, 신체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며, 신체를 매개로 하는 친교 행위를 깔보아서는 안 된다. 신체는 누구에게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최초의 타자이다. 자기 신체의 타자성을 받아들인다면 신체를 매개로 하여 연결되는 타자의 존재를 지배나 통제의 대상, 위협이나 공포의 원천으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타자의 중심에 여성이 있다.

어쩌면 강도만 다를 뿐, 나의 엄마, 누나, 할머니, 여자친구 모두가 김복남일 것이다. 그리고 나, 나의 아빠, 할아버지는 모두 김복남의 남편의 모습을 갖고 있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모두 여성혐오를 혐오해야 한다. 남성혐오를 혐오해야 한다는 책이 나올 때까지. 아니, 그것을 넘어 인간혐오를 혐오한다는 책이 나올 때까지, 그리고 더 이상 이런 혐오에 관한 책들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바다 건너 온 이 빨간 책은 내 얼굴을, 그리고 내 마음을 붉게 물들였다.

 

1) 범죄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대화를 통해 관계의 회복 또는 갱생을 시도하는 수법.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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