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만든 영화를 강의에서 만날 수 있어서 뜻 깊었다. 특히, 고등학교 때 봤던 [아버지의 깃발]과 함께 봐야하는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미국과 일본 양국의 입장에서 같은 사건을 파악할 수 있어서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고, 일본의 입장을 전달하려고 노력한 영화이지만, 미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태생적으로 미국인의 시각이라는 한계를 지녔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오지마 전투를 비롯한 전쟁은 수많은 개개인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러한 전쟁은 단지 위정자 몇 명의 승인만 있으면 시작될 수 있다. 나는 이 영화 속 개개인의 희생을 보며, 전쟁을 일으키는 소수권력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회의를 느꼈다. 제국의 부와 명예는 제국의 모두가 누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제국 안의 소수에게만 그러한 이윤이 집중될 뿐이다. 그 부를 위해 제국 안의 다수, 제국 밖의 모든 인류가 그들이 일으킨 불필요한 갈등(전쟁)의 희생양이 돼야 하는 것이다.

국가라는 미명 아래 짓밟히는 개개인들의 소중한 가치는 주인공 시미즈의 대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조국을 위해, 천황을 위해 나의 임무를 다하고 싶어. 하지만 개죽음은 당하기 싫어.” 자신의 목숨을 걸만큼 생애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 목표가 어처구니없게도 조국천황을 위한 것이라면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 아시아의 민중들을 짓밟는 조국, 죽음을 강요하는 천황이 어찌 생명을 희생할 만한 놀랍고 대단한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쩌면 조국이 제국이라는 것은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러한 제국을 곁에 둔 이웃나라 국민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특징과 문제들을 잘 집어냈다. 무기가 떨어진 일본군이 항복이 아닌 집단자살을 감행한 장면처럼, 기본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는 정부, 군부, 국민의 집단적 광기가 기반이었다. 이는 사무라이 정신, 천황에 대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충성 때문에 나타난 황당한 행동양식이다.

이 영화는 일제를 미화했다는 명목으로 국내에서는 개봉되지 못했지만, 세계 유수의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우리의 입장에서 다소 아쉽고, 안타까운 부분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아버지의 깃발]을 통해 미국의 입장을,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통해 일본의 입장을 전한다는 것은 역사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 심각한 편견을 불러올 수 있다. 양국의 희생자들이었던 필리핀, 한국, 중국 등의 입장도 영화 곳곳에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고래싸움에 터진 새우등을 위로하는 영화는 언제쯤 만들어질까?

영화 초반 강제징집 된 일본군이 작업하는 것으로 나오는 노동들은 실제로 대다수가 강제로 일본군에게 끌려온 조선인들에 의해서 실시되었다고 한다. 이 가혹한 강제 노역 중에 많은 조선인들이 죽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역을 견뎌낸 조선인들은 일본군이 되어 천황을 위해 미국과 싸워야하는 처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오지마 전투가 끝나고 약 40여명의 조선인 포로가 발견되었다.

이오지마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처럼 자신들이 신봉하는 천황과 조국을 위해 징집되어 온 일본군이 아니라, 그런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와 물과 식사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강간을 당하고, 노동하고, 전투에 참가해야 했던 조선인들이다. 실제로 일제는 조선뿐만이 아니라 중국 등에서도 만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때 함께 파시즘적 제국주의를 형성했던 독일, 이태리와는 달리 지금도 위정자들이 나서서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갖거나, 이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야스쿠니 신사를 유력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일 등일 것이다. 최근에는 오사카의 시장인 하시모토 도루가 성노예 강제동원과 관련해 피해자들의 증언은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면서 일본이 조직적으로 식민지 여성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한 증거가 없다는 발언을 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채, 집단 치매에 걸린 일본은 늙은 호랑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해야,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겪었던 설움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반일을, 일본은 혐한을 없애는 일은 진짜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일본은 경제를 넘어 인류애로도 선진국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조그만 섬에 갇혀 자위대로 자위하는 짓부터 그만두어라.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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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의도

농업 사회로부터 근대 산업 사회로의 전환 과정에서 상층 지주계급과 농민들이 담당했던 여러 가지 정치적 역할을 설명하는 것

이 두 농촌집단이 개별적으로 또는 함께 서양의 의회 민주주의와 좌우의 독재 체제, 즉 파시스트 정권과 공산주의 정권이 대두하던 그 이면에서 중요한 세력이 되게끔 만든 역사적 조건의 범위를 발견하려는 시도

20세기에 나타났던 세 가지의 상이한 정치 체제인 의회 민주주의, 파시즘 및 공산주의의 사회적·역사적 기원을 찾는 것인데, 그가 특히 주목하는 점은 그 전환 과정에서 농촌 사회의 양대 세력인 지주 계급과 농민이 담당했던 역할

이러한 작업을 위해 무어는 앞서 언급한 세 정치 체제를 대표하는 나라를 선택하여 비교역사학적 고찰을 시도함. 첫 번째 의회 민주주의의 경우로는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 두 번째 파시즘의 경우로는 일본, 공산주의의 경우로는 중국이 검토되고 있고, 과거 한 때 아시아의 민주주의로 지칭되던 인도의 경우는 제4의 유형으로 논의됨

 

서양식 민주주의의 조건

무어는 어떤 특정의 집단이나 개인이 지배자의 권력으로부터의 간섭이 배제된 자유로운 영역을 누릴 수 있다는 관념, 부정의한 권위에 대한 저항의 권리를 가진다는 관념, 그리고 자유로운 개인 사이에 자유롭게 맺어지는 상호적 약속으로서의 계약 관념 등을 지적함. 이러한 관념군은 오로지 서유럽에서만 출현했는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요한 정치 세력, 즉 절대군주, 농촌의 지주 세력으로서의 귀족, 그리고 도시 세력으로서의 부르주아지 사이의 일정한 균형 상태가 이루어져야 했다고 설명함

그러한 사회 세력 또는 계급 간 일정한 균형 상태의 존재 여부와 성격을 결정짓는 주요 요인으로서 무어는 세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상업적 충격의 강도, 상업적 농업의 형식과 농민 혁명의 잠재력이 그것임

 

상업화된 농업에 있어서의 노동 통제 방식

무어는 농촌에서 지주계급이 시장을 상대로 한 농업 활동을 위해 노동력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 이상형적 유형을 제시하는데, 바로 노동억압적 방식과 시장적 방식임. 전자의 경우는 농민 사회의 기존 체제를 바꾸지 않은 채 이들의 노동력 확보를 위해 정치적 강제력을 사용하는 것을 말하고, 후자는 노동 시장을 통한 노동력 확보 방식을 말함

 

방법상의 문제

로스만은 무어의 이론적 입장을 첫째, 생산양식이 사회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결정하고, 둘째, 모든 지배계급은 가능한 최대의 착취를 일차적 목표로 한다는 두 가지 명제로 구성되는 경제적 결정론으로 규정하면서 이 결정론의 결함을 지적함. 로스만은 무어의 논의에 대한 대안으로 문화적 접근법을 제시함. 그는 무어가 비판하는 문화적 접근이야말로 무어로 대표되는 네오마르크스주의 또는 다른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이론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라고 강조함

또한 국제관계 측면에 관련된 논의가 부족하다는 지적과 함께 군사적 요소에 대한 논의가 없다는 점도 자주 지적됨.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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