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74일생]론 코빅이라는 실제 베트남 참전군인의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영화는 론을 통해 미국의 야만적인 역사와 함께 베트남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태어난 론은 애국심과 영웅심에 도취되어 베트남전에 해병대로 지원한다. 그는 베트남으로 파병되어 민간인을 학살하고, 자신의 부하를 실수로 죽인다. 그 역시 총상으로 인해 생사의 고통을 넘나들다가 하반신 마비가 되고 만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시위대를 보며 당황한다. 그가 사랑하던 도나도 자신의 신념과는 달리 시위에 참여하자, 그는 절망한다. 상실의 늪에서 그를 건져 올린 것은 자신이 죽인 부하 윌리엄에 대한 그의 사죄였다. 베트남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불면에 시달리던 론은 사죄를 통해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죄의식에서 벗어나자, 또다시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나오는 것을 막고자 반전운동에 참여한다.

이 영화를 보며 어떤 정치적 방향성도 없던 보통 사람이 어떻게 정치적 투사로 거듭나게 되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었다. 반전운동 속에서 론이 가졌던 기존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데모 학생들에 대해 발포명령 내리기를 서슴지 않는 위정자들의 도덕성에 회의를 느끼면서 그는 세상의 위선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전쟁이 발발했을 때, 가장 불쌍한 것은 힘없는 국민일 것이다. 헛된 명목으로 목숨을 걸고 참전해야 하고, 전후 적절한 보상을 받는 것도 어렵다. 베트남전과 마찬가지로 위의 영화 [더 리더]의 배경이 된 제2차 세계대전을 함께 생각해보자. 그 전쟁에서도 가장 많이 죽은 국민은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국민들이라고 한다.

제국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의 집중과 군부의 대두를 수반한다. 베트남전에서의 교훈은 망각한 채, 9·11테러를 계기로 미국의 국제관계는 무력으로 밀어붙이는 군국주의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현재 미국의 군사비는 전 세계 군사비의 약 40%에 달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 세계 38개국에서 725개의 군사기지를 보유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미국은 탐욕적인 제국이 아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진정 민주주의의 수호 국가일까? 이러한 질문 자체가 독립국가 베트남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을 영화는 증명하고 있다.

가스통 든 할아버지들, 당장 객석에 앉아 당신들이 사랑하는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두 눈 부릅뜨고 확인하세요!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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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만든 영화를 강의에서 만날 수 있어서 뜻 깊었다. 특히, 고등학교 때 봤던 [아버지의 깃발]과 함께 봐야하는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미국과 일본 양국의 입장에서 같은 사건을 파악할 수 있어서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고, 일본의 입장을 전달하려고 노력한 영화이지만, 미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태생적으로 미국인의 시각이라는 한계를 지녔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오지마 전투를 비롯한 전쟁은 수많은 개개인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러한 전쟁은 단지 위정자 몇 명의 승인만 있으면 시작될 수 있다. 나는 이 영화 속 개개인의 희생을 보며, 전쟁을 일으키는 소수권력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회의를 느꼈다. 제국의 부와 명예는 제국의 모두가 누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제국 안의 소수에게만 그러한 이윤이 집중될 뿐이다. 그 부를 위해 제국 안의 다수, 제국 밖의 모든 인류가 그들이 일으킨 불필요한 갈등(전쟁)의 희생양이 돼야 하는 것이다.

국가라는 미명 아래 짓밟히는 개개인들의 소중한 가치는 주인공 시미즈의 대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조국을 위해, 천황을 위해 나의 임무를 다하고 싶어. 하지만 개죽음은 당하기 싫어.” 자신의 목숨을 걸만큼 생애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 목표가 어처구니없게도 조국천황을 위한 것이라면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 아시아의 민중들을 짓밟는 조국, 죽음을 강요하는 천황이 어찌 생명을 희생할 만한 놀랍고 대단한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쩌면 조국이 제국이라는 것은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러한 제국을 곁에 둔 이웃나라 국민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특징과 문제들을 잘 집어냈다. 무기가 떨어진 일본군이 항복이 아닌 집단자살을 감행한 장면처럼, 기본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는 정부, 군부, 국민의 집단적 광기가 기반이었다. 이는 사무라이 정신, 천황에 대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충성 때문에 나타난 황당한 행동양식이다.

이 영화는 일제를 미화했다는 명목으로 국내에서는 개봉되지 못했지만, 세계 유수의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우리의 입장에서 다소 아쉽고, 안타까운 부분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아버지의 깃발]을 통해 미국의 입장을,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통해 일본의 입장을 전한다는 것은 역사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 심각한 편견을 불러올 수 있다. 양국의 희생자들이었던 필리핀, 한국, 중국 등의 입장도 영화 곳곳에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고래싸움에 터진 새우등을 위로하는 영화는 언제쯤 만들어질까?

영화 초반 강제징집 된 일본군이 작업하는 것으로 나오는 노동들은 실제로 대다수가 강제로 일본군에게 끌려온 조선인들에 의해서 실시되었다고 한다. 이 가혹한 강제 노역 중에 많은 조선인들이 죽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역을 견뎌낸 조선인들은 일본군이 되어 천황을 위해 미국과 싸워야하는 처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오지마 전투가 끝나고 약 40여명의 조선인 포로가 발견되었다.

이오지마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처럼 자신들이 신봉하는 천황과 조국을 위해 징집되어 온 일본군이 아니라, 그런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와 물과 식사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강간을 당하고, 노동하고, 전투에 참가해야 했던 조선인들이다. 실제로 일제는 조선뿐만이 아니라 중국 등에서도 만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때 함께 파시즘적 제국주의를 형성했던 독일, 이태리와는 달리 지금도 위정자들이 나서서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갖거나, 이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야스쿠니 신사를 유력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일 등일 것이다. 최근에는 오사카의 시장인 하시모토 도루가 성노예 강제동원과 관련해 피해자들의 증언은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면서 일본이 조직적으로 식민지 여성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한 증거가 없다는 발언을 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채, 집단 치매에 걸린 일본은 늙은 호랑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해야,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겪었던 설움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반일을, 일본은 혐한을 없애는 일은 진짜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일본은 경제를 넘어 인류애로도 선진국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조그만 섬에 갇혀 자위대로 자위하는 짓부터 그만두어라.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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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배포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 등의 유대인 중심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에게 행하는 무분별한 폭력과 범죄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유대인 학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반면에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위와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나치 추종자들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영화라 참신하고 흥미로웠다. 전쟁세대를 대표하는 여인과, 그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소년의 사랑이 이 영화의 주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36세의 여인과 15세 소년의 섹스, 그리고 전범자의 전범 시기 속에서의 사랑을 미화하고 있는 것이 다소 자극적이고 문제적으로 느껴졌다.

작품 속 36세의 여인 한나는 무지한 인물이다. 한나는 글자를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자, 전쟁에 세뇌당하여 사리 분별을 할 줄 모르는 까막눈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치주의자들은 한나 같은 평범한 국민을 상대로 선동정치를 계획적으로 조장하였고, 나치의 실력자였던 괴벨스는 정치에서 선동의 역할이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하고, 선동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나치의 선동은 공보부가 모든 미디어를 통해 주도하였다고 한다.

한나는 이와 같은 선동의 영향을 받아 살인을 방조하는 중죄를 지었지만, 영화 속에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한나를 단순한 죄인이라고 치부하기 보다는, 시대의 부조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보는 관점이 부분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나를 비롯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분명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며, 독일인을 넘어 인류 모두가 계속 상기해야 할 두려운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나치 중에는 한나처럼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행동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이유로 모든 나치의 하급 관리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비원을 포함한 나치에 복무했던 하급관리 거의 모두가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숨기려고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율과 규칙을 목숨처럼 여기는 한나는 이와 달리 당당하게 행동한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있으면 보통 사람은 부끄러워하지만, 한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위에서 시켰다는 분명하고 고지식한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할 때 정당한 이유가 있던 그녀는, 사회가 자신에게 부여한 죄를 하나도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의 상황에만 지나치게 몰입해 한나의 죄를 생각하는 것은,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게 되는 것 아닌가하는 상대적인 반감이 내 마음속에 동시에 들기도 했다. 실제로 영화는, 유대인학살은 단순히 무지한 결과이므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통렬히 반성하며, 가해자들에게 적당한 벌을 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한편, 한나가 나치전범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마이클은 혼란에 빠진다. 마이클은 한나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지만, 한나의 죄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나는 과거의 잘못된 이념 속에서 살던 사람이라면, 마이클의 현재의 달라진 사회를 사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마이클이 미래를 상징하는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는 장면이었다. 이처럼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관계 속에서 사회는 성장하고 발전한다. 최근 독일은 우리의 일베처럼 네오나치즘이 문제가 되고 있다. 네오나치즘은 나치즘의 현대판으로서 나치 독일과 나치즘의 부활을 추구하며 극우, 민족주의적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네오나치즘은 외국인노동자 등 타 인종에 대해 증오와 분노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달라진 시대 속에서, 마이클의 딸은 한나처럼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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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갑작스럽게 요르단의 왕위에 오른 압둘라 국왕은 부친의 정치스타일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나 차이는 경제적인 영역에 더욱더 치중하고 있고 그 한 방편으로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초기에 민주화 의지를 보였으나 이후 그 속도가 늦춰졌다. 이러한 상황은 요르단이 처한 급변하는 중동 정세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압둘라 국왕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미국은 그의 취임 원년에만 225백만 달러를 요르단에 지원했다.

본 글에서는 압둘라 국왕 즉위 이후 변화한 요르단의 상황을, 미국·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보고자 한다. 더불어 요르단의 중동에서의 영향력과 그 중요성을 감안해 미국·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 속에서 그들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재정의 해보려고 한다.

 

이스라엘과의 관계와 미국과의 관계를 나눠서 살펴보고자 한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외교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하므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살펴보고, 그와 더불어 홍해해양평화공원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가려고 한다. 미국과의 외교는 경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특히 그 중심에 있는 미국-요르단 자유무역 협정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 마지막으로 최근 양국 간 외교 동향을 알아보며 본론은 갈무리하겠다.

 

1)팔레스타인 문제

요르단은 아랍 및 범 이슬람권과의 기존 협력 관계를 강화하면서, 이슬람 서방 간 대립 해소를 위한 온건 이슬람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압둘라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해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압둘라는 예루살렘이 유대인의 수도인 동시에 장래 팔레스타인 정부의 수도인 '개방도시'로 선언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그가 집권한 해에 팔라스타인 과격단체인 하마스의 요르단 사무소를 폐쇄한 것은 국내에서 과격단체들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20009월 팔레스타인에서 제2차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압둘라는 이스라엘-요르단 관계의 악화뿐만이 아니라 왕정 자체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이에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자연히 소원해지고 200011월에 임기가 끝나는 주 이스라엘 대사의 후임자를 발표하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러나 양국 간의 긴장고조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전반기에 양국의 무역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0% 증가했다.

 

2)요르단-이스라엘의 홍해해양평화공원

홍해해양평화공원의 운영조직은 압둘라 등장 이후 설립되었다. 이 조직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정기적으로 교류를 통해 홍해해양평화공원에 대한 특별 관리 사항과 정보 교육 프로그램의 쟁점 사항 등을 공유하도록 하였다. 양국이 체계적으로 협력 할 수 있는 조직이 구성 돼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현재 홍해해양평화공원에는 환경보호, 지역경제발전, 양국 간 갈등해소 등 다양한 순기능이 나타나고 있다. 분쟁지역에 해양평화공원을 지정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양국 간의 갈등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고 볼 수 있다.

 

3)경제

요르단은 199912월에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했고, 200010월에는 미국과 세계에서 14번째로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한층 접근하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외자를 유치하기 위하여 특별경제구역을 설정하기도 했고, 2001년 가을에는 630개의 기업체들이 여기에 등록하였다. 특히 대미수출관세면제특구를 확대하여, 현재는 11개 지역이 면제 특구로 지정 돼 있다.

더불어 장기간에 걸쳐 국가재정에 짐이 되어온 공기업의 민영화작업도 추진하고 있다. 한 예로 요르단 시멘트 공사의 정부 지분 33%를 프랑스회사에 매각하였으며 요르단의 공기업 중 가장 규모가 큰 것 중 하나인 요르단 인산광산공사도 민영화했다.

지금껏 요르단의 전통적인 수출 상대국은 이라크, 인도, 사우디아라비아로 이 세 나라가 전체 수출의 35%를 차지했다. 하지만, 압둘라 등장 이후 대미 수출은 큰 폭으로 증가하여 2000년에는 대미수출액이 약 4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불과 3년 사이에 대미 수출액이 30배가량 증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4)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20006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겠다고 발표한지 단 4개월 만에 두 나라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그해, 12월부터 공식적으로 발효가 됐다. 요르단은 아랍 국가 중 처음으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나라가 됐다. 미국이 요르단과 협정을 체결한 것은 그것의 경제적 의미보다도 정치적 의미를 훨씬 중요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스라엘과 아랍국가간의 분쟁이 반세기 이상 계속 되고 있는 중동 지역에 분쟁을 종식시키고 이 지역 아랍국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정치적 고려가 짙게 베여 있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약소국이면서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요르단의 입장에서 보면 협정의 체결은 경제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미국 시장에 진입하기가 훨씬 자유로워져 수출의 증가는 물론이고 대미수출에서 무관세 혜택을 누리려는 외국기업의 요르단 진출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르단 역시 협정 체결에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이러한 양국의 태도가 협상의 신속한 마무리를 가능하게 한 배경이 되었다.

협정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다른 자유무역협정과 달리 무역과 환경, 노동, 전자상거래 등에 관한 별도의 조항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노동과 관련해서 양국은 자유무역과 노동자의 권리가 양립할 수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무역의 촉진을 위해 노동기준을 악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노동기준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마찬가지로 환경에 대해서도 무역의 촉진을 위해 환경기준을 완화하는 것을 피하기로 하고, 엄격한 환경보호, 환경법의 개선, 기존 환경법의 엄격한 준수 등의 합의 했다. 노동법과 환경법 준수 여부에 대한 양국 간 의견 불일치가 발생할 경우 분쟁해결절차에 따라 처리하기로 했다.

 

5)최근 관계 동향

평화 외교, 경제에 이어 최근에는 미국과 요르단의 군사적 동맹까지 강화되고 있다. 두 국가는 다음 달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한다고 양국 합참의장이 22일 밝혔다. 이번 군사훈련은 양국 군 협력 강화와 테러 및 위기 대처 능력 향상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상 아랍의 헤게모니를 지배하려는 미국의 패권주의의 강화로 보인다. 이번 군사훈련은 요르단 군사훈련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이며 5개 대륙에서 8000명이 참가한다.

 

우리는 지금껏 요르단이, 압둘라 국왕 즉위 이후 온건아랍세력의 대변자로 친 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대표적인 아랍 국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주변아랍국가와의 관계도 중시하는 균형외교를 추구하는 것도 파악했다. 하지만 지나친 친미노선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제외한 주변국들과의 관계 악화, 팔레스타인 출신이 대부분인 국민들의 압둘라 국왕에 대한 반감과 투쟁 등은 요르단이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이다.

그들의 외교 활동의 목표는 미국 및 유럽과의 우호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동평화협상의 핵심 중재자로서의 지속적인 역할을 맡는 것이다. 요르단이 진정으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바탕으로 한 아랍의 대표적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미군과 네타냐후의 마음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고 있는 요르단 국민의 마음부터 헤아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참고문헌

1.-요르단 자유무역협정이 요르단 경제에 미친 영향(세계지역연구센터 아시아 팀, 2003)

2.분쟁수역 평화적 이용 사례(통일한국, 이동훈, 2008)

3.중동평화와 외교의 중심(명지대학교, 장세원, 2005)

4.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글 논 그림 밭, 정수란 역, 2012)

5.전쟁국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동정책(문화과학사, 홍성태,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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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칠레하면 어떤 생각을 먼저 할까? -칠레 자유무역협정? 칠레산 와인? 아니면 길쭉하게 생긴 칠레의 국토? 지구 정반대의 나라?

사실 나 역시 칠레 역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세계최초로 민주주의 선거로 세운 사회주의 국가가 칠레라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고, 그들의 혁명이 광주민주화운동, 혹은 한국 현대사와 너무 닮아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사는 미국 CIA의 군부 쿠데타 지원과 피의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에 맞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염원하는 민중의 항쟁이 선연한 핏자국으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이자 희망의 역사일 것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비극적인 나라 중의 한 곳을 뽑으라면 아마 칠레라는 대답이 다수를 차지하지 않을까.

 

칠레 혁명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1970년 최초로 칠레에서 대통령선거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4번만의 도전 끝에 성공한 살바도르 아옌데. 세계적인 평화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단일화에 성공한 그는 칠레국민에게 진정한 민주국가를 수립하고 진정한 칠레의 최초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사람이다.

 

칠레는 구리가 세계에서 가장 매장이 많이 돼 있는 곳 중 하나인데, 미국계 회사들이 이를 독점해 칠레 민중에게 돌아가는 이득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통령에 당선된 아옌데 정부는 구리와 기타 산업들을 국유화 하며 토지개혁 등 여러 개혁을 시작한다. 자신의 기득권이 무너지는 꼴을 못 보는 우익세력과 자본가 세력은, 미국과 힘을 합쳐 아옌데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구리재고를 풀어 구리 값을 폭락시키는 등의 경제봉쇄 정책을 펴고, 우익세력들은 주유소, 병원, 상점 등이 파업하게 하는 등 칠레의 경제를 계속 흔든다.

모든 책임은 아옌데 정부에게 돌아갔고 민심도 흔들리고 군부도 흔들리는 가운데 아옌데는 피노체트를 믿고 그를 3군 지휘관으로 임명하지만, 그는 미국과 우익세력을 등에 업고 3주 만에 쿠데타를 일으킨다.

작전명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가 라디오에서 계속 울려 퍼지고, 군은 대통령이 궁에서 나와 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그는 끝까지 대통령궁에서 나오지 않고 국민들을 향해 마지막 연설을 한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박해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저 상황에서 아옌데처럼 저렇게 의연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국가와 나의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내던질 수 있을까?

미국의 9.11이 제국의 침략과 그에 대한 항거에서 일어난 불상사라고 읽을 수 있다면, 칠레의 9.11은 파시스트들이 민중의 힘으로 탄생시킨 지도자 아옌데를 제거하고 소수 자본가들의 특권을 연장하기 위한 반동의 불상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 이상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지금, 끝까지 총을 들고 저항했던 아옌데는 칠레인들의 가슴 속에 잊을 수 없는 영웅으로 자리매김 돼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우파라고 칭하는 국내의 부패한 기득권에게 묻고 싶다. 우파는 최소한 도덕적의고 타국의 횡포에 분노하는 민족주의자여야 하지 않는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는 비도덕적이고 자신의 기존 이익을 위해 단 한치도 양보하지 않은 채 최소한의 자존심도 내버리는 것을 단순히 우파라 칭하고 있지는 않은가? 김구 선생 같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우파가 아니겠는가?

1973년 산티아고에는, 1980년 광주에는 비가 아니라, 피가 내렸고 눈물이 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배반한 채 수구기득권세력의 인식과 논리에 동조하고 있지는 않는가? 무한한 상상으로 행동을 해보자. 꿈은 꾸는 자의 특권이고,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공화국의 모든 시민들이 물질적 복지와 정신적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역사적 임무일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언젠가를 울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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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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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전의 쿠바

1898년 스페인에 점령돼있던 쿠바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에 의해 독립은 인정됐지만 또 다른 종속을 당한다. 1930년대 선린정책을 주장한 루즈벨트에 의해 미국의 쿠바에 대한 종속 정책은 누그러든다. 이 시기 쿠바는 독재자 마차도의 실각이후 과도정부가 수립됐으나 바티스타 등 하사관이 주축이 된 쿠데타에 의해 다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된다. 바티스타는 서민적인 정책을 펼쳐 자신의 독재기반을 넓혀갔다. 그의 집권 중 쿠바는 정치 경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개인적인 치부와 부패가 심했으며, 쿠바는 미국의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해갔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장기간 휴식을 취한 바티스타는 다시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그는 언론을 통제하고 대학을 폐쇄했으며 반체제 인사들을 투옥했다. 그리고 의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며 장기독재를 위한 권력 기반을 확보한다.

 

쿠바혁명

반미학생운동의 대부였던 카스트로는 폭력에 의한 혁명을 꿈꾸게 된다. 그는 몬카다 병영의 습격으로 대정부 무력투쟁을 시작하지만 이는 곧 실패한다. 그는 석방이 됐으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멕시코로 망명한다. 그는 체게바라를 만나 그린마호를 타고 쿠바로 나아가다 배가 암초에 부딪혀 좌초된다. 그 후 카스트로는 미국의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바티스타를 비난했고, 게릴라 군을 강화시켰다. 다시 바티스타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펼친 그는 승리했고,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여 새로운 혁명 정부를 수립한다.

 

혁명 이후의 쿠바

카스트로는 석유법과 대기업 국유화법을 제정하여, 1960년 쿠바에 있던 미국인 소유 기업과 은행들을 모두 국유화했다. 미국은 경제제재를 가했지만, 러시아에 지원을 받은 쿠바는 사회주의화를 가속한다. 대농장에 토지를 소유하여 각 농가에 분배했고, 나머지 농민들은 농지개혁청이 관리하는 협동농장에서 농사를 짓게 했다.

미국은 바티스타의 잔존세력과 용병의 연합군을 쿠바에 침투시키지만 패배했고, 미국 내 쿠바자산 동결로 응수한다. 반면에 쿠바는 제당산업의 근대화에 주력했고, 지역과 주 단위의 선거를 실시하여 대의체제를 확립했다.

현재 쿠바의 전 인민이 12년간 무상 의무교육을 받고 있으며, 무상 의료 서비스 혜택을 누리고 있다. 학생이 10명 이하인 학교도 2,000여개에 달한다. 2008년 은퇴를 선언한 카스트로에 이어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권자에 앉아있다.

 

쿠바의 한계

국가의 통제 속에 이루어진 사회주의 혁명의 과정은 다양한 이견들과 소수의 목소리들을 모두 포용하지 못했다. 양심수가 500명에 이르는 등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받았다. 쿠바 정부는 이론적으로는 계급 특권을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공산당원 또는 정부에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우대가 존재한다. 교통, 직업, 주거, 대학 교육 그리고 보다 우수한 보건 혜택을 받는 것은 정부나 또는 공산당 내에서 신분을 가져야 가능하다. 보통 인민들은 외국의 초청이 없는 한 해외로 출국할 수도 없다.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기득권은 대부분 백인이나 메스티소가 소유하고 있다.

카스트로는 영화와 출판 산업 등 문화산업 분야도 장악했다. 이 때 쿠바인민들의 전통적인 축제마저 사라졌다. 쿠바의 문화예술인에게 혁명 옹호 이외의 문화 활동은 허용되지 않은 것이다. 한 때는 종교 역시 탄압의 대상이었다.

쿠바는 북한과 비슷한 검열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쿠바 정부는 인터넷을 21세기의 큰 질병이라고 부른다. 컴퓨터 소유가 금지되어 컴퓨터 보유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 인터넷을 이용할 권리는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허가되며, 이들도 감시받는다. 불법적인 인터넷 연결은 징역 5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악화 역시 쿠바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멕시코와 함께 라틴아메리카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던 쿠바는,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패권이 강해지면서 경제봉쇄가 모든 나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쿠바 내의 반군의 활동은 지속됐고, 극심한 경제난을 겪는다. 쿠바 정부는 주택, 선박, 농장 등에 세금을 부과했고, 부분적으로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도입하지만 인민에게 부담만 안겨주었을 뿐 경제난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이에 카스트로는 인민의 대규모 국외로의 탈출을 허용하기도 했다. 정부는 이들을 인간쓰레기라고 매도했지만, 그들은 단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는 더는 삶을 지탱할 수 없다고 결심한 평범한 시민들일 뿐이었다. 무상 의료 서비스로 인해 의사들은 응급 환자에게 촌지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암시장이 활발해지는 등의 도덕불감증 또한 팽배해졌다.

 

반쪽짜리 사회주의 혹은 실패한 사회주의

19945월 쿠바의 입법부가 가장 획기적인 개혁안을 통과시킨 이래 중요한 내용을 요약하면 세금부과, 적자를 내는 국영기업에 대한 지원 금지, 공적으로 제공되는 물품 및 서비스의 가격인상, 저축 장려, 외환순환의 통제(즉 페소화의 태환화 유도) 등이다. IMF가 권고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개혁안은 쿠바 사회내부의 계층 및 계급 간의 괴리를 확대하는 동시에 사회 중간층 이하의 삶을 매우 어렵게 만들 것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정책이 비사회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쿠바 정부는 자본주의적인 것을 더 많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재정지출의 축소, 전 국민의 달러소지 자유화 등의 신경제정책을 추진한다. 라울 카스트로 역시 규제 완화, 배급 및 급여제도 개선을 시행한다. 사설 면허 택시의 허가, 임대 형식이기는 하지만 개인의 농지 소유 역시 허용된다. 뿐만 아니라 직원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이 원칙적으로 19.5달러의 월급을 받는다는 급여 상한 제한을 철폐하고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했다. 사회주의적 경제제도를 보호하기 위해 시행했던 이중화폐제도 역시 단일화폐로 변화했고, 배급카드 제도마저 단계적으로 폐지되고 있다. 국영기업에 대한 자율권도 부여됐다. 쿠바가 반쪽주의 사회주의 혹은 실패한 사회주의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굿바이 레닌. 동독에서도, 쿠바에서도.

레닌은 공산주의 그 자체로 표현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굿바이 레닌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공산주의의 몰락을 의미한다. 신념과 이상이 사라진 한바탕 꿈같은 20세기의 일이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시작은 언제나 창대했지만 그 뒤에는 이 존재했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가진 꿈과 사랑은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는 불완전한 것이다. 인간은 이념을 떠나보낼 때 슬픔과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그것의 끝이 존재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끝에는 슬픔을 녹여줄 아름다운 불꽃과 같은 새로운 이상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동독인들은 통일된 독일에서 어떤 감정이었을까? 자본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쿠바의 국민들은 현재 어떤 마음일까?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실직, 상대적 빈곤감, 패배감과 굴욕감 같은 것들이었다. 동독의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통일되기 전의 동독 시절을 그리워 할 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쿠바 역시 훗날 가난했지만, 평등했던 20세기를 추억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영화는 순간순간 통일이 되었지만, 아직 갈등이 봉합되지 않는 서독과 동독의 상황을 보여주었다.

알렉스와 그의 어머니와, 지금도 무너져 내린 레닌이 그리운 벗들아. 슬퍼하지 말지어다. 사회주의는 몰락했지만, 인간 해방의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니까. 자본주의의 풍요와 빈곤, 차별과 격차 역시 언젠가는 사회주의의 길을 밟을 것이다. 그렇게 조용히 혁명은 진행된다. , 자동차, 가방, 안경, 사회를 보는 시선까지, 세상에는 바꿔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참고문헌 사이트

쿠바 사회주의의 위기와 앞날, 권혁범, 사회과학원, 사상22, 1994.9, 155-189

쿠바혁명과 그 변천에 관한 연구, 최정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1990

라틴아메리카 리더스다이제스트

위키피디아

 

쿠바 사회주의의 위기와 앞날, 권혁범, 사회과학원, 사상22, 1994.9, p.11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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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 북핵 위기 및 미·북 단독 협상과 억제 실패

 

(1) 협상을 위주로 한 첫 번째 북핵 대응

1989년 프랑스가 영변에 건설 중인 북한의 비밀 핵시설 사진을 공개함. 이에 노태우 정보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북한은 역으로 대북 모의 핵공격 시나리오가 포함돼 있는 한미연합사 주도의 팀스피릿 훈련에 대한 문제 제기함.

1991년 노태우 정부는 판문점 군사회담을 통해 북한이 핵개발 문제와 관련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할 것이라고 제안함. 그러나 북한은 이미 1991년 말 시점에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이 거의 완성단계였음.

1991년 남북공동선언 합의, 1992년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됨.

1992년 북한은 IAEA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IAEA에 핵 프로그램 내용을 담은 최초 보고서를 제출함. IAEA2차 임시사찰 중 최초 북한이 제출한 내용의 오류가 발견되고, IAEA는 추가 사찰을 수차례 요구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NPT를 탈퇴함. 북한은 이때부터 통미봉남 전술을 구사함.

북한과 미국은 뉴욕에서 열린 실무 접촉에서 핵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1994년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하고 3차 고위급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함.

(평가) 한미 양국은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사태가 불거지기 전까지 대화와 협상과 같은 양보의 제스처만 취하면서 결과적으로 북핵 위기를 키우는 자충수를 둠. 당시 한국은 북한과 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 보유 금지에 대한 논의만 진행했을 뿐, 이미 북한이 완성에 근접한 단계까지 개발해 놓은 핵무기에 대한 포기 언급은 하지 않는 실수를 저지름. 또한 북한과 재처리 시설 보유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한반도 비핵와 공동선언을 체결함으로써 차후 우리나라 원전 가동 후 핵연료 재처리 문제에 스스로 족쇄를 채워버린 꼴이 됨.

 

(2) 잘못된 선례 남긴 제네바 합의

1994년 판문점 남북 실무 접촉에서 남측의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팀스피릿 훈련 재개를 검토하겠다는 발언과 북측의 전쟁이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된다는 발언 등으로 인해 협상이 결렬됨.

IAEA는 북한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했고, 북한은 정전협정 무효화와 군사정전위원회 탈퇴를 선언함.

이 같은 전쟁 위기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을 전격 방문, 김일성과 회동함으로써 전환점을 맞음. 북미는 제네바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을 통해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경수로 지원과 중유 등 대체 에너지 제공의 조건으로 폐연료봉을 밀봉하는데 합의하고, 제네바 기본 합의서를 체결함.

이에 따라 미국은 한, 일과 함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를 설립, 북한에 경수로 2기를 건설해주고, 매년 중유 50만 톤을 제공함.

이러한 한반도 문제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배제됨. 한미 양국 간에도 수시로 이견이 발생함.

(평가) 1995년부터 북한과 파키스탄이 우라늄 농축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이 확인되면서 북한의 기만 전술에 넘어가 북한 핵무기 개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시간만 벌어준 꼴이 됨.

 

2. 북핵 위기 재발과 국제협력을 통한 핵문제 해결 실패

 

(1)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다자간 대화 노력의 시작

1996년 북한은 미국에게 자신의 정권 안전을 보장하는 잠정협정 체결을 제안하고, 이어서 비무장지대의 유지 및 관리에 대한 임무 포기를 선언하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중무장한 대대급 병력을 투입해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정전협정의 근간을 흔들며 정전협정을 대체할 완전한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기 시작함.

북한의 이러한 요구에 따라 협상을 통한 북핵문제 완전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논의하기 위한 4자회담이 추진됨.

1차 회담에서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2차 회담에서는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함. 3차 회담에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한반도 긴장 완하를 논의하는 분과위원회를 설치하는데 합의함. 4차 회담에서는 이 분과위의 운영 절차에 대해 합의함. 5차와 6차 회담은 별다른 성과가 없이 끝남.

1998년 뉴욕타임즈는 북한의 핵 개발 재개 가능성을 제기함. 이에 미국은 북미 고위급 회담에서 지하 핵시설 의혹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나, 북한은 답변을 거부함.

북한과 미국은 1999년 금창리 시설을 사찰하기로 하고, 3차 사찰까지 실시하는 대신 그 대가로 북한에 식량 60만 톤을 지원하기로 합의함. 이 합의를 근거로 미국 조사단이 금창리를 방문했으나, 이 시설은 핵 개발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짐.

금창리 핵시설 의혹 해명과 북한의 미사일 모라토리엄 선언 등이 이어지자 미국은 2000, 6·25 전쟁 이후 취해졌던 북한에 대한 대부분의 제재 조치를 완화하는 결정을 내림.

2001년 북한은 새로 들어선 부시 행정부가 기존의 대북정책을 수정할 경우 핵과 미사일 관련한 기존의 합의를 모두 파기할 것임을 경고함. 또한 경수로 건설 지연에 따른 전력 손실을 보상하라고 촉구함. 미국은 북한에 10만 톤의 식량을 지원한다고 발표함.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핵 개발 재개 의혹을 제기하며 핵무기를 포함한 WMD 관련 사찰을 투명하게 받을 것을 요구하고 나섬. 이어서 유엔 총회에서 북한의 핵 사찰 수용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나, 북한은 핵 사찰을 거부함.

미국은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하며 제2차 북핵 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함. 북한은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존재를 시인하였고, 이어서 CIA는 북한이 이미 1~2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추가 제조를 위한 플루토늄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2003년까지 7~8개의 핵무기 보유도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공개하면서 본격적인 제2차 북핵 위기가 터짐.

이에 북한은 중유 공급이 중단되면 제네바 기본 합의를 파기하겠다고 선언하였고, IAEA는 북한의 핵 개발 포기를 요구하는 성명을 채택함. 또한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하는 공동 선언을 발표함.

그러나 북한은 핵 시설 재가동을 선언함. 북한은 IAEA가 설치한 원자로 봉인과 감시카메라를 제거하고,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재처리 시설에 대한 봉인과 감시 장치도 제거함. 또한 북한은 핵 시설 봉인 해제를 완료하고, 감시체계를 완전히 철거했으며, 핵 연료봉 1,000개를 원자로에 장전했다고 발표함. 나아가 북한은 NPT 탈퇴와 IAEA 안전조치협정 폐기를 선언함.

미국이 군사적 공격을 분비하고 중국이 원유 지원을 중단하는 등 강경 입장을 보이자 북한은 돌연 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고, 2003년 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3자 회담이 열림. 이 회담에서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고, 이를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만약 폐기를 원한다면 정권 안전 보장, 대규모 경제 지원 및 경제 제재 해제,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해 협상은 결렬됨. 북한은 미국과의 양자 회담을 원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국제 사회에 공조하여 북한 핵 문제에 대응하며,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개발했기 때문에 개발 저지는 늦었다고 보고 확산 저지로 정책 목표를 선회함.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을 발표하면서 앞으로 북한을 겨냥해 국제사회와 공조하여 핵무기와 미사일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억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냄. 이어서 미국은 북한에게 앞으로의 핵 협상은 CVID 원칙이 적용될 것이라고 천명함.

 

(2) 북 핵개발 시간만 벌어준 6자회담

2003년 제16자회담은 그동안 남북 또는 북미 사이의 문제가 동북아시아 6개 국의 국제 문제로 확대되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주변 5개 국가가 모두 협상 대상자로 나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음.

2004년 제26자회담에서는 회담을 정례화하는데 합의함.

이어서 20046월 열린 제36자회담에서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일괄타결방안에 대해 미국이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최종적으로는 결렬 되었고, 회담 이후 미국 상원이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키면서 6자회담 재개 가능성은 낮아짐.

 

(3) BDA 제재와 국제사회의 재굴복

2005년 제46자회담 1단계 회의에서 미국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제조와 관련하여 고농축 우라늄이라는 표현 대신 ‘UEF’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좀 더 유연한 자세로 협상에 임했으나, 북한이 미북 양자 대화를 통한 구체적인 보상 방안을 요구하며 중단됨.

2단계 회의에서는 북핵 문제는 물론 북한이 요구하는 평화협정 체결 문제와 동북아시아 다자간 안보기구 문제까지 거론되며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9·19 공동성명을 채택했으나, 회담 직후 터진 BDA 사건으로 인해 이 공동성명은 휴지조각이 되고 맘. 북한은 즉각 반발하며 9·19 성명의 내용대로 즉각 경수로 지원 재개와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했으나, 미국은 해성무역, 조선광성무역, 조선부강무역 등 북한 8개 기업을 대량살상무기 확산 개입 협의로 추가 제재 명단에 올리며 북한을 압박함.

200511월 열린 제56자회담 1차 회의에서 북한은 BDA 계좌 동결 문제와 8개 북한 기업 제재 문제를 들고 나오며 이를 즉각 해제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하며 1차 회의는 성과 없이 종료됨.

한국은 미국이 북한의 체제 붕괴를 위한 노력이 계속될 경우 한미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한미 관계에도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함. 한국은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고,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논의에도 비협조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북핵 포기라는 6자회담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함.

2006년 북한은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대포동 2호와 노동 1, 스커드 미사일 등 7발의 탄도 미사일을 연속 발사함. 이에 국제사회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제1695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하며 북한을 압박함. 이 결의안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며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모든 유형의 발사 행위 금지, 모든 유엔 회원국에게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 지원 금지, 북한의 조건 없는 6자회담 복귀와 핵 개발 프로그램 포기 등을 촉구하고 있었으나, 경제나 군사적 제재와 같은 직접적인 조치는 포함되지 않음.

북한은 200610월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지하 핵실험장에서 제1차 핵실험을 강행함. 핵실험 직후 채택된 안보리 결의 제1718호는 대량살상무기 관련 금수 조치와 비군사적 제재만 허용하는 내용을 담음. 이어진 북미 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은 북미 양자 회담 수용, 북한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통한 북한 문제 해결, 미국이 고수해오던 CVID 요구를 거론하지 않는 등의 내용에 합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북한의 위세만 높여줌.

마침내 200612월 제56자회담 2단계가 진행되었으나, 북한은 BDA 제재 해제를 요구했고, 미국이 난색을 표하면서 회담은 결렬됨. 그러나 결국 미국은 20072월 북한 계좌 1,100만 달러에 대한 동결 해제를 통보하고, 9·19 선언을 이행하기로 합의하는 2·13 합의를 채택함.

2·13 합의는 총 60, 2단계에 걸쳐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불능화하고, 미국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중유 지원 재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 등을 약속함. 이에 따라 미국은 BDA 동결 북한 자금을 전액 북한에 반환하기로 발표하고, 북한은 전액을 반환받는 대신 제66자회담 1단계 회의에 참석하기로 약속했으나, 이후 전액 입금되지 않았다며 제66자회담 1단계 회의에 불참함.

 

(4) 협박과 보상 반복이 불러온 잘못된 학습효과

북한이 다시 회담에 복귀한 것은 BDA 자금 대북 송금이 완료되고, 한국이 지원하는 중유 1차 분이 선봉항에 도착한 이후임.

북한은 20076, 핵 불능화 조치가 충실히 이행되고 있다며 5개 국 외신을 불러놓고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였으나, 8월 미국이 확인을 요구하자 불능화 중단을 선포하고, 9월에는 폭파한 영변 핵시설 복구 작업을 시작함. 또한 재처리 시설에 대한 IAEA의 감시 장비를 제거함. 또한 11IAEA 사찰단이 북한에 당도하여 시료 채취 등 검증작업을 벌이려 하자 이를 거부하고 방해하며, 국제사회와의 합의를 이행할 뜻이 전혀 없음을 드러냈고, 이후 완전히 강경책으로 돌아섬.

2009년 북한은 미국에게 대북 적대정책을 청산하고 핵 위협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내놓은데 이어, 국제사회에 미사용 연료봉을 구매해 갈 것을 요구함. 이어서 남북 전면 대결 태세를 선언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것을 공표하며 긴장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결국 3,000km 가량의 사정거리를 가진 것으로 판단되는 은하 2호를 발사함.

유엔 안보리는 4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비난하는 의장 성명을 채택했는데, 북한은 이를 빌미로 IAEA 감시 요원을 쫓아냈고, PSI 등의 제재는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협박함. 이후 미국에서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 법안이 제출되고, 유엔 안보리가 3개 북한 기업을 추가로 제재 대상으로 지정하자 북한은 5월 제2차 핵실험을 단행하고, 한반도가 전쟁상황이라며 위협함. 이에 유엔 안보리는 6월 대북 제재결의인 제1874호를 채택하며 제재 수위를 높임.

북한은 11월 플루토늄을 무기화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고, 서해 대청도 부근에서 해상 도발을 감행하더니, 20103월에는 천안함을 어뢰로 폭침시키며 극도의 긴장 상태를 조성함. 이어서 북한은 11월 영변에서 대규모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하고, 연평도에서 포격 도발을 일으켜 20여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킴. 또한 북한은 2012년 미국과의 2·29 합의를 깨고 장거리 미사일인 은하 3호를 발사함. 이에 국제사회는 20131월 유엔 안보리 대북 제개 결의 2087호를 채택하며 제재 수위를 높임.

북한은 2월 제3차 핵실험을 강행하며 핵탄두 소형화와 고위력화에 성공했음을 발표함.

(평가) 유엔을 통해 이루어진 국제적 대북 제재안은 원칙대로 시행되었을 경우 북한에 대해 치명적인 경제적 타격을 줄 수 있었지만, 중국의 유엔 제재안 미준수와 러시아의 소극적 동참으로 인해 미국이 취한 통치자금 동결 외에는 실질적인 제재 효과를 거두지 못함. , 북한은 실효성 없는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와 중국의 비호 속에서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핵개발을 위한 15년 이상의 시간을 벌었고, 이를 통해 실전 사용이 가능한 핵탄두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에 협상을 통한 국제사회의 대북 핵 포기 노력은 사실상 아무 효과가 없었음.

 

3. 외교적 노력의 한계와 군사적 대응의 타당성

 

(1)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키운 북한의 핵능력

1993년 제1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을 당시 국제사회는 군사력을 동원해 해결 방안을 모색함. 당시 미국 정치권은 초당적 차원에서 대북 군사 행동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을 촉구함. 실제로 당시 미국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정밀 타격을 준비하고 있었음.

미국이 본격적인 군사 행동을 준비하자 북한은 방북한 카터 전 대통령에게 대화 의사를 피력하고,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하여 5개월 만에 제네바 합의에 서명함. 그러나 미국은 이미 북한이 플루토늄을 이용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아직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고 현재 진행형인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사찰만을 조건으로 대규모 보상을 약속했기 때문에 북한에게 위협을 통한 긴장 조성 = 보상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 첫 번째 선례를 만듬. 이 선례 이후 북한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결코 전쟁을 각오할 의지가 없음을 인식했고, 전쟁을 주저하는 국제사회를 상대로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며 핵무기와 미사일을 이용한 갈취 외교를 전개해나가기 시작함.

2002년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시인하며 불거진 제2차 북핵 위기 당시에도 국제사회는 협상을 통한 북한 핵문제 해결방안을 모색함.

1차 핵실험 이후에도 국제사회는 군사적 옵션은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안보리 결의안 1718호를 채택하는 수준에서 대북 제재를 결의했지만, 무역과 금융자산 등에 대한 제재만 언급된 이 결의안은 북한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자 우방인 중국의 비협조로 사실상 북한에 거의 피해를 주지 못함. 문제는 이러한 결의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국제사회는 추가적인 제재 옵션을 고려하기보다 북한의 강경 대응에 굴복해 북한이 요구하는대로 BDA 계좌 동결 조치를 해제해주는 전략적 판단 착오를 저지름.

결국 북한은 2009년 제2차 핵실험을 강행했고, 2012년에는 은하 3호를 발사하고, 2013년 제3차 핵실험을 단행함.

3차 핵실험은 기존 두 번의 핵실험과는 성격이 다름. 전술 핵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위력이 부족했던 기존의 1·2차 핵실험은 북한이 핵분열을 이용한 폭발 장치를 개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정밀한 기폭장치 제조에는 실패해 핵분열 효율성을 완벽하게 끌어내지 못했고, 이는 고위력화는 물론, 소형화에도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임. 그러나 추정위력 40kt을 달성한 제3차 핵실험은 북한이 약 30여 년간에 걸친 핵무기 개발을 사실상 완료하고, 핵탄두를 실전배치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뜻함. 이는 한국과 미국 등 국제사회가 30여 년에 걸친 북한의 핵개발 과정에서 이를 막기 위해 펼쳤던 모든 행위들이 사실상 무의미했다는 뜻임.

 

(2) 국제사회의 다섯가지 실책과 군사적 대응의 필요성

첫째, 북한 핵개발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국내 정치 상황을 고려해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고, 대응 행위의 목적이 핵개발 방지라는 예방적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의 시점이 이미 고농축 우라늄 생산이나 플루토늄 추출이라는 행위가 이루어진 뒤에 행해졌다는 점임.

둘째,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핵무기에 대한 대응 방안을 강구하기보다는 우라늄 농축이나 플루토늄 추출과 같은 제조 과정에 대한 사찰과 제재에만 초점을 두고 대응해왔다는 점임.

셋째, 북한이라는 믿을 수 없는 상대와 협상을 진행하면서 반드시 필요한 CVID 원칙을 스스로 내려놓아 북한의 합의 이행을 검증할 수 없는 틀 안에서 일방적인 보상을 제공하여 북한이 합의 이행에 대한 의무감을 갖도록 노력하지 않음.

넷째, 위기 상황이 조성될 때마다 무력 사용 옵션은 배제하고 협상을 통한 사태 해결만을 강구함.

다섯째, 실효성 없는 제재를 남발함.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대응은 그들의 통치 기반과 실질적 핵 능력을 위협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할 수 있는 옵션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립해야 함. 북한의 통치기반을 위협할 수 있는 수단으로는 종래와 같은 외교적 수단, 특히 해외의 통치자금에 대한 직접적인 제재가 가장 유효함.

또한 투트랙 전략으로 군사적 옵션이 필요함. 군사적 옵션을 통해 북한이 이미 보유하고 있거나 보유할 수 있는 핵무기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여 그들의 핵무기를 협상용으로 사용할 수 없는 무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군사적 옵션을 공세적으로 활용하여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통치수단에 대한 직접 타격이나 핵 시설 파괴 등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임.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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