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작품으로 1987년에 개봉한 영화 [마지막 황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역사적 변혁을 거치며 평범한 시민이 돼가는 푸이의 인생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으며, 모든 대사는 영어로 되어 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며, 프랑스의 역사를 영어 대사로 만들어 놀랐는데, 중국의 제국이었던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이야기마저 레미제라블 개봉 훨씬 이전에 영어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시 현대의 새로운 제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푸이는 고작 3세의 나이로 청나라의 황제에 오르지만 위안스카이와 쑨원과의 협약에 따라 이내 퇴위한다. 협약의 내용에 따라 외국 군주의 대접에 준하여 청나라의 황제 대우를 받지만 자금성 내에서만 한정될 뿐이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실권이 사라지고 자금성 안에서만 자라야 했던 푸이는 영국인 가정교사 존스턴 밑에서 영국유학의 꿈을 꾸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푸이는 존스턴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양복, 자전거, 안경, 전화나 영어잡지 등의 유럽의 최신 수입품을 접하게 된다. 푸이는 자금성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 변발을 자르는 등, 존스턴이 가져온 서양의 생활양식과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푸이는 이후 펑위샹의 쿠데타로 인해 결국 가족과 함께 자금성에서 쫓겨나지만, 자신이 대대로 내려오던 만주국의 영도자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만주국의 황제가 된다. 하지만 그를 도왔던 일본이 새로운 제국주의 야욕을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푸이의 톈진 이주는 만주에 본격적 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 관동군과 푸이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중화민국 정부는 만주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푸이의 행보에 곤혹스러워 했다.

푸이는 193431일에 만주국 황제에 즉위하여 강덕제가 되었다. 관동군의 주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만주국의 헌법상에서는 황제는 국무원 총리를 시작으로 대신들을 임명할 수 있었지만, 차관 이하의 관료에 대해서는 1932년 조인한 <일만의정서>에 의해서 관동군이 일본인을 만주국의 관리에게 임명 혹은 파면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관동군의 동의가 없으면 임면 할 수 없었다. 황제의 칭호는 허울뿐이었고 일본의 괴뢰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국체에 관련되는 중요 사항의 결정에는 푸이뿐만이 아니라 관동군의 인증이 필요하였고 만주국 관직의 약 절반을 일본인이 차지하였으며 건국 당초 만주국 독자적인 군대나 국적법이 존재하지 않는 등, 관동군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 이후 만주국의 사라지고, 푸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포로로 잡혀 수용 생활 이후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전국위원을 지냈다. 제국의 황제에서, 평범한 정원사가 되어 살아가는 푸이. 이제는 외국인 관광객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으로 변한 자금성. 중화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푸이에 대한 자료를 찾으며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는 다음과 같은 인민푸이의 말년의 모습을 발견했다.

한 멕시코 기자가 푸이를 인터뷰하러 가서 마지막 황제 푸이는 처참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한 미국 언론의 오보를 상기시키자 맞다. 마지막 황제이며 일본 침략자들의 괴뢰였던 푸이는 이미 죽었다. 나는 새로 태어난 노동자다라며 푸이는 정부의 비위를 맞췄다. 친척이나 예전의 신하들, 식물원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황상(皇上)”이라고 부르거나 재미 삼아 어이, 황제라며 웃을 때도 나는 예전의 푸이가 아니다. 황제 푸이는 지은 죄가 커서 이미 죽었다. 나는 평민 푸이다라며 진지하게 말했다. 남들이 까먹을 만하면 오랜 기간 제왕 생활을 하다 보니 나쁜 습관이 몸에 뱄다. 아직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다는 유의 말을 반복했다. 소속이 베이징식물원이다 보니 화단에 물을 주는 장면이 가끔 신문에 실렸다. 일반 중국인들은 푸이가 바느질하는 모습이나 빨래하고 청소하는 모습도 화보 등을 통해 자주 볼 수 있었다.

 

영화 속 화려하고 웅장한 자금성의 모습을 먼저 이야기 하고 싶다. 34년 전에 자금성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다. 자금성은 베이징의 중심에 있는 명과 청 왕조의 궁궐이다. 자금성의 규모는 궁궐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현재는 황실이 사라져서 중국어권에서는 주로 고궁으로 불리고 있으며, 192510월 고궁 박물원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방문했을 당시, 한국의 궁궐을 압도하는 크기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 자금성의 주인이었던, 청나라는 만주족과 한족이 명나라에 이어 만든 나라이다. 원래 청나라는 1616년에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동북 지역에 건국한 금(후금)에서 시작하여, 훗날 청으로 국호를 바꿨다. 청나라 초기에는 훌륭한 황제들(강희제, 건륭제)이 통치했다. 한족의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몽골 제국(원나라)을 제외한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이루었다. 청나라 시대에는 외국 무역이 더욱 활발해져, 은의 유입도 크게 증가하였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자금성에 이어 인상 깊었던 장면은, 중국의 서구화를 갈망하며 서구문화를 적극 수용하려고 하는 푸이의 모습이다. 이는 푸이가 안경을 착용하고, 청나라의 복잡한 전통 혼례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탭댄스를 잘 추는 현대여성을 황후로 맞고 싶고, 서양식 단발을 도입하기 위해 변발을 잘라 주위를 경악시키는 행동에서 드러났다. 이미 아편전쟁, 태평천국운동, 청나라 내 변방의 반란 등을 통해 제국은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마저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노력보다 서구화에 편입돼 가는 모습 속에서 제국의 역사의 덧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서구문화의 동경은 비단 푸이에게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서양의 일부일처제 및 신사조에 눈을 뜨고 푸이 곁을 떠나는 후궁 문수에게도 무너져가는 제국의 모습이 보였다.

상징적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대사 “Open the door” 못지않게 영화 속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는 당신은 나에 대해 아는 게 없소라고 말하는 하인의 대사이었다. 실제 대사처럼 푸이는 하인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권력이 사라진 자신에게, 자질구레한 일을 해주는 하인에게는 부인과 세 아이가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쩌면 청나라 멸망의 이유가 바로 이 대사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비단 청나라라는 중화제국 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제국, 혹은 위정자들이 백성들, 혹은 주위 나라들을 돌아보지 못한 채, 자기 자신밖에 볼 줄 모른다면 그 제국은 결국 멸망하고 만다.

 

4)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이탈리아 출신의 영화감독이다. 1962, 감독 데뷔작 [‘즉사혹은 냉혹한 학살자’]가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영화감독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대담한 성적 묘사로 알려지면서 예술인가 포르노인가의 논의가 제기되었다.

 

5) 신해혁명(辛亥革命)1911년 청을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이다. 이 혁명은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라서 공화혁명이라고도 불린다.

 

6) 아편 전쟁(Opium Wars)19세기 중반에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7) 청나라 말기 홍수전이 창시한 배상제회라는 그리스도교 비밀결사를 토대로 청조 타도와 새 왕조 건설을 목적으로 일어난 농민운동(1851~64).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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