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를 혐오한다]를 읽고

 

몇 년 전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세계 영화계를 넘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무도라는 외딴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김복남의 남편은 김복남을 육체적으로 학대하고, 딸을 성폭행한다. 김복남은 하루 종일 노예처럼 일하고, 시동생에게도 성적인 학대를 당한다. 하지만 여성이(할머니들) 대부분인 섬사람 모두 김복남이 처한 상황을 외면한다. 그녀의 친구인 해원도 자신과 딸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다. 무도에서 김복남을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녀는 딸을 데리고 섬에서 도망치던 중 딸이 넘어져 죽자, 자신을 학대하고 외면한 모두를 낫으로 베어 죽이는 복수를 감행한다.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는 김복남을 떠올리게 했다. 김복남은 저자가 지적하는 여성혐오의 거의 모든 현상들을 경험한 불운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 책은 그녀의 살인이 몇몇 악인에 의해 일어난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된 담론과 제도 속에서 우리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사건이었음을 증명한다. 이제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를 통해, 왜 김복남이 그러한 핍박받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김복남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보기로 하자.

저자는 먼저 여성혐오를 정의한다. 여성혐오를 성별이원제 젠더 속에서 파악하고 이러한 질서 속에서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남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화 되는 것, 즉 성적 주체의 위치로부터 전락하는 것이다. 반대로 남성화는 한 여자를 자기 지배하에 두는 것으로써 담보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객관화, 타자화, 여성멸시가 여성혐오인 것이다.(p.37) 그렇다면 김복남에 대한 혐오를 넘은 여성들의 방관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김복남을 타자화함으로써 그것을 공유하는 다른 이(힘 있는 남성)들과 동일화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책 중반부에 파멜라 슐츠의 사례를 소개한다. 성폭력 피해자인 슐츠는 가해자 측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기 위해 수감자를 찾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이 저지른 죄는 역겨운 것이지만 그들은 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슐츠는 이들 남성 대부분이 자기평가가 낮으며 스스로 학대당한 경험이 있는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피해자들의 격분을 사면서까지 수복적 사법의 중요성을 설파한다.(p.99) 수복적 사법을 김복남의 경우에도 사용할 수 있을까?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학대를 받은 피해자에게 수복적 사법은 2차 피해가 되지는 않을까? 가해자는 감형받기 위해 참회가 아닌 연기를 하지는 않을까? 기대보다는 우려가 크게 느껴졌다.

저자는 이어서 일본의 다양한 문학 작품을 통해 여성혐오의 현실을 설명하는데, 에토의 작품도 그 중의 하나였다. 저자는 모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딸의 태도를 지적한다. 딸은 내 의사를 전혀 반영시킬 수 없는 남성에게 인생의 조타를 맡긴 채 답답한 어머니가 되는 것 말고는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념하기 때문에 늘 불만스럽다는 것이다.(p.151) 극중 김복남의 딸도 늘 어머니 김복남을 별 이유 없이 불만스러워했는데, 이러한 서술로 딸의 행동에 대한 이해가 가능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사회의 모든 딸들-, 여성혐오는 근대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의 보편적인 감정이 되고 만다.

저자는 어머니의 질투를 설명하면서 이와쓰키 겐지의 주장을 책에 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는 딸을 질투한다. 그렇기 때문에 딸이 행복해지려 할 때마다 어머니는 그것을 방해한다.(p.167) 어머니의 질투가 일정하게 딸에게 투여되고 있는 것은 수긍하지만, 확증편향에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김복남 역시 무도 탈출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남편의 딸에 대한 성폭행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아빠의 딸에 대한 성폭행이라고 표현했지만, 영화 속에서 딸은 아빠를 유혹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저자는, 딸은 자신의 유혹에 아버지가 굴복한 그 순간 아버지를 경멸할 충분한 이유를 손에 넣게 되고, 그때 아버지는 단순한 학대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단순한 근친상간을 넘어 어쩌면 아빠에 대한 딸의 복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반면 저자의 논리가 다소 무리하다고 느낀 부분도 있었다. 먼저 아무리 잔혹한 상상력이라 할지라도 표상의 생산을 단속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부분이었다.(p.95) 이러한 표상이 보상이나 보완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데, 반대로 표상이 계기나 주입이 될 때도 있기 때문에 나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무차별적인 강간 동영상, 학대 동영상, 아동성폭행 동영상 등의 표상도 단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떠한 제한도 없이 생산해내고 소비하는 사회에 남아있을 의식과 담론은 무엇일까? 여자 세계의 암묵적 지식을 이성에게 알리는 행위는 사실 배반 행위이자 반칙 행위라 할 수 있다는 부분도 동의하기 어려웠다.(p.197) 여성이든 남성이든 서로의 지식을 알리고, 소통하고, 이해하고, 잘못된 것은 수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지식 혹은 정보의 공유를 배반 혹은 반칙으로 단정 지어 표현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느껴졌다.

저자의 말처럼 이 세상은 남녀 공학 문화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남학교 문화와 그것에 부수하는 이성애 문화로 이루어져 있다. 남성의 성공을 나타내는 사회적인 지표는 아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하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돈이 얼마나 드는가?’이다. 성의 사회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인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로서 계급적인 산물이며, 한 계급이 다른 계급으로부터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근대 사회의 프라이버시는 오직 강자만을 지키는데 이용될 뿐이다. 이러한 수많은 모순과 억압 속에서, 저자는 여성혐오를 극복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여성이 극복하는 시나리오, 다른 하나는 남성이 극복하는 시나리오다.(p.297) 나와 같은 남성이 여성혐오를 넘어설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신체의 타자화를 그만두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체 및 신체성의 지배자로서의 정신이 주체됨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리고 신체성과 연결되는 성, 임신, 출산, 육아를 여성의 영역으로 여기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신체의 욕망과 그 욕망의 귀결점을 마주 바라보고, 신체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며, 신체를 매개로 하는 친교 행위를 깔보아서는 안 된다. 신체는 누구에게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최초의 타자이다. 자기 신체의 타자성을 받아들인다면 신체를 매개로 하여 연결되는 타자의 존재를 지배나 통제의 대상, 위협이나 공포의 원천으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타자의 중심에 여성이 있다.

어쩌면 강도만 다를 뿐, 나의 엄마, 누나, 할머니, 여자친구 모두가 김복남일 것이다. 그리고 나, 나의 아빠, 할아버지는 모두 김복남의 남편의 모습을 갖고 있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모두 여성혐오를 혐오해야 한다. 남성혐오를 혐오해야 한다는 책이 나올 때까지. 아니, 그것을 넘어 인간혐오를 혐오한다는 책이 나올 때까지, 그리고 더 이상 이런 혐오에 관한 책들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바다 건너 온 이 빨간 책은 내 얼굴을, 그리고 내 마음을 붉게 물들였다.

 

1) 범죄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대화를 통해 관계의 회복 또는 갱생을 시도하는 수법.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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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아로새기는 고통

 

 

교수님의 소개로 작가 조정래의오 하느님이라는 작은 책을 교내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쌓인 눈이 조금씩 녹아가던 변두리의 저녁, 나는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숨겨진 역사의 이야기에 내 좁은 가슴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참말로 소설다운 소설이었다. 나는 보통, 소설은 이야기 전개의 필연성이 드러나야 한다고 여겼다. 물론 이 소설에서 필연성을 발견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정말 우연과 같다고 느낄 정도로 기가 막힌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 내용이 단지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노르망디 해전에 독일군복을 입은 조선인이 참전했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강자의 뜻대로 굴러가는 것이 사회이고, 강자에 의해 기록되어지는 것이 역사이기 때문에 약소국 조선의 힘없는 백성은 그가 왜 그 허허벌판에서 총을 들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제2차 세계대전, 그 한가운데에 서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작중인물들에 대한 고달픔과 서러움을 느껴 몇 번이고 가슴으로 울었다고 말했다. 약육강식의 논리는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나보다.

나는 몇 년 전에 반년 동안 스리랑카에서 자원 봉사 활동을 했다. 그 곳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스리랑카의 부조리한 사회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스리랑카는 현재 다수의 싱할라족과 소수의 타밀족이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다. 여러 사회 부분에서 싱할라족은 타밀족을 차별한다. 종교, 언어, 문화가 다른 타밀족은 독립을 원하고 있지만, 스리랑카 정부는 절대 불허방침을 분명히 하며 그들을 무력으로 탄압한다. 타밀족은 타밀 군을 조직하여 싱할라족과 전쟁을 했고, 수도 콜롬보에서는 테러를 자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득을 얻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싱할라족은 이득을 얻었을까? 물론 아니다. 스리랑카 정부는 지금의 전시 상황을 자기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명분으로 삼고 있다. 스리랑카의 경제발전은 뒷전이고, 국민들의 민주화는 갈수록 후퇴한다. 굶주리는 싱할라족, 학교에 가지 못하는 싱할라족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타밀족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이득을 본 것은 권력 유지에 눈이 먼 소수의 지배층뿐이었다. 전쟁과 테러로 억울하게 죽어 간 영혼들의 넋을 그 누가 위로한단 말인가?

스리랑카만이 아니라 지금 전 세계에서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는 부지기수다.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탄자니아, 이라크 그리고 우리 민족의 또 다른 이름 북한까지.

국제사회의 강자나 사회 기득권층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당한 과정을 통해 권력을 얻은 정치가, 애민정신을 발휘하는 리더, 갈등을 폭력이 아닌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군부, 자국에 이익뿐만이 아니라 인류 사회의 진보에도 역량을 발휘하는 강자와 사회기득권층은 나도 아주 존경한다.

잊어버린 약자의 눈을 통해, 역사 소설을 쓰는 조정래와 같은 시대의 대변인들이 행하는 작업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책 속의 그들은,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잦은 풍랑을 맞으며 핏빛 영화의 한 장면을 장식했다. 이러한 조정래의 작업은 단순히 닳고 닳은 캐 묵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 제시일 것이다. 힘없는 소수가 자신의 의견을 언제든지 개진할 수 있고 그들을 존중하는 사회 시스템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은 아닐까? 특히 조정래처럼 이러한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만들 수 있는 유명 작가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즈음 사회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판타지와 무협 소설, 연애 소설이 스테디셀러로 서점의 문학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한, 인문학의 위기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과제일 것이다. 문학이 인간 사회의 끼치는 영향을 실로 위대하다.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판되자 한동안 독일에서는 베르테르 세대라고 불리던 젊은 층의 자살률이 급격하게 높아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설 속에서 베르테르는 로즈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자살을 한다.) 문학이 담당한 기존의 역할을 다한다면 결코 문학에 대한 수요층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순수문학이 왜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래, 공지영 등의 일부 작가들은 시대가 흘러도 왜 변치 않는 사랑을 독자들로부터 받고 있는지 이 글을 읽으며 나는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이야기라도 되는 냥 소설속의 주인공이 되어 소설을 읽는 버릇이 있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주인공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에서 나치 군복을 입고 어설프게 서있었다. 추운 바람이 살갗을 뚫고 들어와 따사로운 내 고장을 그리워하게 했고, 큰 키와 큰 코의 백인들의 매서운 눈빛에서 혹시나 총살당하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향수(鄕愁)와 공포(恐怖)였던 것이다.

나의 고향은 구성진 남도가락이 구기자 밭을 타고 흐르는 보배의 섬진도이다. 나는 유학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애향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에 자리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진도에 살면서 낙후된 환경에 사는촌스러운나는 명절에 세련된 옷을 입고 집에 오는 하얀 얼굴의 사촌 동생들에게까지 적잖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 된 후에 어릴 적 냇가에서 함께 멱을 감던 불알친구들, 낙지와 고동에 물씬 베인 갯냄새, 할머니가 구워주신 구수한 고구마가 그리워 남몰래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친 적도 있다.

스리랑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큼한 내 조국의 김치, 아름다운 한글로 쓰인 소설,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온돌방이 못 견디게 그리워서 정해진 기간을 채우지 않은 채로 조기 귀국을 할까 생각하기도 했고, 한인 교회, 추석 한인 축제 등 한인 행사가 있을 때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내가 이 정도였는데, 원치 않은 채로 조선을 떠나 몽골을 거쳐 독일, 미국까지 가게 된 가난한 민초들의 향수는 얼마나 컸을까? 황폐하고 추운 소련으로 강제 이주돼 평생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던 고려인들의 향수는 얼마나 컸을까? 그들은 다함께 포로로 수용 돼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우리 민족의 한이 담긴 민요를 구성지게 부른다.

아쉽게도 그들의 서글픈 민요는 끝끝내 조선에서는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세계열강들의 위대하고 잘난 목적 사이에서 그들이 주장한 내용은 모두 한낱 마이동풍과 같은 부질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뜻을 말이 안 통하는 백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혈서를 썼던 그들의 간절함. 하루의 빵 두개와 맹물 같은 국을 마시며 중노동에 시달려도 저 버릴 수 없었던 귀국의 소망. 버티지 못한 동료들이 한 명, 두 명 죽어갈 때도 놓지 않았던, 끝끝내 부여잡고 놓지 않았던 생에 대한 의지. 두고 온 딸내미의 그 똘똘한 눈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그들은 그렇게 역사의 태풍에 맞서서 맨몸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어떻게 내 가슴으로 들여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현재 사회에는 아름다운재단, 지역아동센터협의회 등의 단체들이 있고 복지 정책은 날로 발전하여, 현재는 외면 받는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적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아사(餓死)당하는 이웃들이 있고, 부정과 가난으로 인해 집과 가족을 잃은 이웃들이 차가운 사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나 홀로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시민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활동들을 할 것이다.

더불어 나는 나의 사상과 철학을 더 깊게, 더 넓게 할 것이며, 사회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더욱 날카롭게 가다듬을 것이다. 작가처럼 펜이 아니더라도 당당한 시민으로서 투표를 하고, 비리를 감시하고, 내 삶에 천착되어 하루하루를 양심적으로 살아 갈 것이다.

희망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라 했다. 땅에는 애초에 길이 없었지만,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기 때문이다. 나도 사회가 아름답게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회에 진정한 유산을 남길 수 있는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있는 나만의 길을 걸어 나갈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휘몰아치는 역사를 자신의 몸에 새기는 고통을 받았다. 나는 내 의지와 노력을 통해 역사의 진지한 순간들을 내 몸에 아로새기는 고통을 즐겁게 인내할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언젠가는 울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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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시절 섬마을에서 자랐다. 공기가 맑았던 그 마을에는, 여름에 냉방을 위해 창문을 닫아놓은 집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더우면 창문을 열고 부채를 치거나 선풍기를 켜는 게 전부였으며, 에어컨이 있는 집은 단 한 채도 없었다. 돈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무도 에어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전 아버지의 기일에 고향을 찾았을 때, 예전과는 달리 창문을 열어둔 집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미 우리나라 방방곡곡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으면 더위를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변온동물화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만난 책이 일본 최고의 발명가인 후지무라 야스유키의 플러그를 뽑으면 지구가 아름답다이다. 환경부 지정 우수환경도서라는 스티커가 책에 대한 신뢰를 한층 높여주었다. 이 책은 막대한 에너지소비와 갖은 화학물질들로 만연한 현대사회의 폐해와, 그로 인한 환경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그의 철학과 성과가 잘 반영되어 있다. 다양한 사진과 이해하기 쉬운 저자의 설명은, 글을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저자는 전략화에 반하는 비전력화라는 개념을 통해 오염된 현대사회의 대안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불필요한 플러그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비전력화에 공감하고 응원하는 소비자는 아직 소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대는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나도 저자의 의견에 공감하고 환경의 입장에서 비전력화를 실천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환경이라는 단어 속에서 불편이라는 의미만을 끄집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에너지를 절약하는 일상 속에서 나는 도리어 안락함을 느꼈다. 자취방에서 어머니가 사준 내복을 입으며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이겨냈고, 텔레비전과 컴퓨터의 플러그를 뽑았을 때 주위를 돌아볼 여백이 내 일상에도 생겨났다. 어린 시절 난방비를 절약하기 위해 한 방에 둘러앉은 우리 형제가 서로를 불편하다고 느꼈던 순간은 단 한 차례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나이를 먹고, 요즘 들어 심해진 복부비만은 책의 내용과는 반대로 내가 지금껏 추구해온 쾌락편리의 결과일 것이다. 나는 복부비만의 주범인 다디단 커피를 무척 즐긴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전기포트를 자주 사용하는데, 저자는 전기포트가 전기냉장고보다 더 많은 전력을 소비하는 만큼 사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은 쾌락과 편리를 버리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말은 이러한 상황에 쓰이리라. 내가 전기포트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복부비만도 해소되고, 좋은 환경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전기포트를 혼자 자취하는 친구에게 주고, 새로 압력솥을 하나 구입했다. 압력솥으로 밥을 지으면 솥 안은 고온이 되고 재료 조직이 느슨해져서 열이 빨리 전달된다고 한다. 이렇게 압력솥으로 조리를 하면 불을 끈 후에도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므로 불을 사용하는 시간과 양이 훨씬 적게 든다. 따라서 가스 소비도 일반 솥보다 4분의 1밖에 하지 않아도 된다. 전기밥솥은 보온과 대기전력도 취사와 거의 비슷한 양의 전력을 소비한다. 때문에 최종적으로 압력솥은 전기밥솥의 20분의 1 이하의 에너지만 사용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나는 책을 통해 변화된 나의 일상을 사회참여로까지 이어가고 싶었다. 뭔가 환경을 위해 뿌듯하고 유익한 활동을 하자고 벼르고 있던 찰나에, 환경부와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에너지의 날행사를 돕는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봉사를 통해 책의 연장선에서 다양한 친환경에너지제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처럼 저자의 말대로 플러그를 뽑는 일은 그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새로운 세계의 창을 여는 일이었다. 그것은 인간과 환경의 지속과 다양성을 생각하는 일이며, 문명의 보다 커다란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의 의지를 마음에 담아, 천천히 이어지는 환경의 물결을 지구에 펼쳐나가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까?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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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학교, 밝은 교실

 

최근 KBS의 드라마 <학교2013>이 충실한 현실 반영으로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얻었다. 학교 폭력, 학생들의 반항, 입시 위주 교육이 <학교2013>의 주요 소재였던 것을 비춰봤을 때, <학교2013>을 통해 최근의 어두운 학교 현실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청자들은 학생들의 반항과 일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교사 직함까지 내려놓고 학생들의 편에 섰던 정인재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하지만 이것이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느꼈던 시청자들도 많았다. 현실의 교육 문제는 교사 몇 명이 변화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의 소설가 루쉰은 희망은 마치 땅위에 길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애초에 땅에는 길이 없었지만,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드라마에서 나와, 현실을 바라보자. 주눅 들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학생들과, 그들의 재주를 믿고 따뜻한 눈길로 기다려주는 선생님들은 과연 우리 사회에 얼마나 존재할까? <우리 반 일용이>라는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가 만든 작은 책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교육에 아직은 희망의 길이 있는지, 일용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우리 반 일용이>는 교실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선생님들의 시각으로 그린 일기 모음집이다. 전체적으로 상처받은 아이들과, 이들을 지켜보는 선생님들의 감동이 이 책의 큰 줄기이다. 일기 속 대부분의 주인공 학생은 단순한 무관심의 차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기피와 혐오를 받는 존재이다.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거의 없거나, 있다 해도 크게 희망적인 것은 아니다. (김명길의 이 새끼 불량품이야에서의 승준, 정유철의 조디.에서의 조형준 등) 이러한 극도의 소외 안에 살고 있는 학생들은 마치 현실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현실에서는 주변부로 존재하는 학생들이, <우리 반 일용이>에서는 주인공이 되어 작품을 끌어가는 점이 참신하다. 대체로 학교에서는 교과 성적만이, 좋은 학생을 설정하는 유일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상석의 스승의 날 선물, 이정석의 지훈이등의 일기는 장애가 있는 학생도 얼마든지 선생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의 편견과 잣대가 장애학생을 억압했지만, 그들이 좋은 선생님과 친구를 만나면서 학생으로서의 삶을 되찾은 내용이다.

한편, 교육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들도 눈에 띈다. 김구민의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원종찬의 아침 교문에서등은 교사 역시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학생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내보인 일기들이었다. 책을 읽으며, 부모의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또 다른 폭력을 가하는 어른들의 각성과 변화도 필요해보였다. 김경해의 일용이, 이주영의 민희 이야기속의 학부모는 학생들의 온전한 생각과 느낌마저 파괴하고 있었다. 가정을 넘어 적나라하게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구자행의 백일장도 인상 깊었다.

마지막으로, 어른들보다 더 깊은 내면을 보여주는 학생들의 이야기는 많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윤태규의 아기를 업고 공부한 정임이, 김현숙의 포도 두 송이등은 학생들이 스스로 끝없이 자라고 뻗어 나갈 재주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 일기들이었다.

 

오늘의 교실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기회의 공간이 아니다. 어쩌면 학생들에게 교실은 생존을 위한 약육강식의 공간일 뿐이다. <우리 반 일용이>에 나오는 몇몇 학생들의 자폐적 의식을 지배하는 심리적 현상은 불안이나 부끄러움이며, 그것을 낳은 사회적 여건은 대부분 가난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책이 개인적인 차원의 비판 내지 감상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전히 교육문제를 의식하는 독자들에게 낯설게 하기의 충격만 주었을 뿐, 그 충격을 바탕으로 어떻게 교육이 변화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난과 편견의 희생자인 학생들이 비극에서 벗어나 다시 안정성을 회복한 점은, 저자들이 교실을 학생들의 자립적인 공간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교육계 차원에서도 교실의 일상을 소외 학생의 생활을 통해 본격적으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 반 일용이>는 교실의 세태를 다룬 일기만은 아니다. 저자들은 학생에 대한 서사적 접근과 아울러 서정적 자아를 통한 내면화도 시도했다. 황금성의 지금도 나를 가르치는 아이, 김광견의 성준이등에서 저자들은 학생들과 화해를 시도하고, 역으로 배우기도 하며, 서사와 서정이 조응하는 서술방식을 구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방식은 이미 머리글에서 예견된 바였다.

 

여기 교실 일기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세요. 놀랍게도 아이들은 저마다 제 힘으로 꿋꿋하게 살아갑니다. (중략) 이 아이들을 보면서 저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재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제 힘으로 살아가고 있지요. (중략) 그래서 아이들한테 배운다는 말을 하는구나, 그래서 지금도 나를 가르치는 아이란 말이 나왔구나 싶었어요. (p.6)

 

교육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교육은 모든 조건에서 독립된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제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들은 신뢰에 기초한 공적영역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우리 반 일용이> 속 교실의 대부분은 처음에는 사제 간의 소통이 더딘 어두운 공간이지만, 그 교실은 학생들의 순수와 선생님들의 사랑으로 아름답게 변한다. 이 아름다움은 교실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간직한, 슬프지만 정직한 아름다움이다. <우리 반 일용이>는 부끄러운 교실을 아름다운 서정의 힘으로 헤쳐나간 셈이다. 저자들이 이 희망의 원리를 치켜들고서 앞으로 세계와 어떻게 싸워나가 더 깊은 울림의 글들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나는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운 선생님, 아름다운 학생을 만난 것이 반갑다.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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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를 꿈꾼다. 자유로운 감정을 찾기 위해 홀로 회사와 가정을 버려두고, 산으로 바다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그렇게 몸뚱이만 떠나는 것이 과연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일까? 이 책속에 떠나는 자유가 아닌 산속 작은 암자에 남아,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사람이 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재산, 가족에 대한 정 등 속세에 대한 바람 없이 부처님에게 귀의한 사람. 그 분이 바로 20세기의 부처라 불리었던 ‘성철’ 대 스님이다. 깨달은 자, 성철 스님은 말 그대로 진정한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스리랑카로 파견되어 봉사활동을 할 때였다. 스리랑카의 유일한 한인들의 절인 사해사에서 탄경스님을 만나고 그곳에서 며칠씩 지내다가 ‘성철스님 시봉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는 반년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동안 고국을 떠나 외진 타국에서 활동을 하며, 심신이 몹시 지쳐가던 시점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내 삶의 나침반이었고, 불안한 정서와 지독한 향수의 한줄기 단비였다. 그 봉사활동을 조기 귀국하지 않고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던 것도 이 책을 통해 내가 불심을 찾으려는 내적 노력을 추구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팀원들과의 갈등, 현지 스텝들과의 갈등, 내 안에서 스스로 부족한 것을 느끼며 움츠러들었던 자괴감까지 책속에 담긴 성철스님의 낡은 사진 한 장으로 녹아듦을 느꼈다.


나는 크게 감명을 받고 탄경스님에게 청연이라는 법명까지 수계 받았다. 불자가 되어 부처님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나에게는 삶의 목적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일찍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더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인 반면에, 외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성철스님과 원택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 꿋꿋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마침내 부처님께 귀의까지 하게 된 것이다.

 

나 같은 미천한 중생들은 육체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 현실의 짐을 내려놓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성철스님은 육체가 어디에 있든, 마음을 놓는 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하안거나, 동안거를 할 때 작은 암자에서 몇 달을 가만히 앉아 수행만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스리랑카라는 큰 사회에서도 답답해 질식할 지경이었지만. 예전에 읽었던 한 책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유명한 작가 한 분은 감옥이 내적 수행을 하는 최적의 장소라고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이처럼 누구에게는 감옥이 수행의 최적의 장소가 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성철 스님에게는 작은 암자가 우주 삼라만상을 마음껏 뛰노는 거대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철스님에게는 이름만을 들어도 느껴지는 묘한 아우라가 있다. 벌써 열반에 드신지 20년이 다 됐지만 지금도 그 아우라는 내게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서 더 커졌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열반에 드셨으니, 지금도 그의 전 생애를 대략적으로 이해하기만도 어려운 나이이지만. 이미 그는 역사가 영원히 기억할 인물 중에 한 분이 되신 것 같다. 나는 미천하지만 용감하게 역사적인 인물과 조우하는 기쁨을 맛본다.


이 책은 원택스님이 성철스님을 시봉한 이야기이다. 원택스님은 독자들이 쉽게 이 책을 즐길 수 있도록 성철스님의 삶을 일화 중심으로 매우 사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원택스님의 노고덕분에 성철스님의 사상이 내 좌심방에서 다시 태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성철스님을 만나 해인사에서 차라도 한잔 대접받은 기분. 차 맛은 쓰지만 달고, 산사는 고즈넉하다. 이 책을 읽으며 썼던 시를 뒤에 덧붙인다.

 

「부처님 오셨다 남루한 눈썹을 차마 들지 못하고
흙냄새 나는 곳에 한 발짝 두 손 짝 기어가
뿌리를 내리고 싶네.
부처님 나무되어 천만년 미소가 염화로 피었구나.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지요
부처님께 물으니
천진한 고승이 목탁을 두드린다.

보살님 차 한 잔 마시고 가시지요」

 

시봉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 동네 뒷산에 올라가면 볼 수 있는 작은 절에 성철스님이 꼭 계실 것만 같다. 혹은 눈 내린 다음날 대문 앞을 쓸고 계신 옆집 아저씨가 꼭 성철스님처럼 생기셨을 것만 같다. 그렇게 성철스님이 이 책 한권으로 다시 우리 삶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이들을 좋아했었다는 스님의 일화가 참말로 인상 깊었다. 성철스님처럼 도가 깊은 분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가 아이들이였다니.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인간은 날 때부터 도를 타고 나지만 속세에서 때가 타서 도를 잊고, 결국은 도와 먼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본연의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참된 도인 것을. 그래서 스님은 책을 읽지 말라고 하셨나보다. 정작 본인은 책을 많이 읽으셨지만, 책을 읽으며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닌, 이미 마음속에 있는 깨달음을 스스로 캐내었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깨우치면 깨우칠수록 아이처럼 순수해졌을 성철스님의 두 눈을 실제로 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삶이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성철스님이라고 하면 부끄럽게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라는 말 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도 사진으로나마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해인사호랑이라는 별명답게 막연히 용맹한 도인 같은 풍모시겠구나 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역시 내 예상처럼 낡은 책속에 담겨진 그의 사진에서마저도 놀라운 기상과 도를 느낄 수 있었다. 실로 그 도가 얼마나 크기에 작은 사진 한 장에서 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성철스님뿐만이 아니라 한국 불교 근대사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와 유명스님들과의 다양한 일화들을 알 수 있었던 것도 흥미로웠다. 성철스님, 원택스님을 비롯하여 법정스님, 불필스님 등의 이름이 나올 때는 띄엄띄엄 알던 한국 불교 명승들의 흐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원택스님처럼 훌륭한 스님이 나오실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성철스님이라는 대 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며, 중생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원택스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한때는 격동의 한국의 20세기 역사를 배우며,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등과는 다르게 사회참여에는 소극적이었던 성철스님을 비판적으로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성철스님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불교와 사회에 대해 생각했고, 종교의 본연의 의미를 살리는데 주력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과거 나치나 일제의 사상에 열광하며 그들을 추종했던 이들을 비춰보더라도, 올바른 앎 없는 무작정 행동만큼
무서운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올바른 앎, 진정한 자유, 절제와 구도, 순수와 자비, 나는 원택스님을 통해 성철스님을 알았고, 성철스님을 통해, 부처님을 만났고, 부처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인을 꿈꾸는 삶을 살게 되었다.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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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투영된 아버지세대 인식연구

 

서론-서평을 넘어서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투영된 인식 연구의 필요성

작년 출판시장은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성공 이후 줄곧 청춘에 대한 자기계발서 열풍이 불었다. 청춘콘서트 2.0, 건투를 빈다.등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비슷한 자기계발서는 줄곧 판매 순위의 상위에 이름을 올렸다. 물론 생활비, 등록금, 취업 등의 스트레스를 겪는 청춘들에 대한 아버지세대의 위로 서적은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청년에 대한 이러한 접근방법은 일정한 한계점을 가진다. 이 들 속에서 아들세대는 어른이 관용을 베풀어야 할 존재로서 고정되며, 이를 아들세대 개개가 극복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는 빈곤한 청년세대라는 사회적 현상이 가진 중층적 함의를 평면화 시켜버리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본 논문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자기계발서로서가 아니라 아버지세대의 기득권 유지 전략으로서 조명하고자 한다. 하나의 단어처럼 각인된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아들세대를 타자화 시킨 아버지세대가 만든 것이다. 이에 본 연구자는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눠진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주제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그 안에 투영된 아버지세대의 인식을 논해보고자 한다.

 

본론-책 속의 아버지세대의 인식에 대한 비판적인 견지

1.네 눈동자 속이 아니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첫 번째 단락의 주제문은 네 눈동자 속이 아니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이다. 이러한 논조는 청춘을 철저하게 고립시킨다. 사회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이러한 주장에서 아버지세대의 아들세대에 대한 냉소와 비판을 읽을 수 있다. 특정 세대에 대한 사회의 암묵적 탄압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사회 시스템이 훼손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공동의 행보를 만드는 것이 어른세대의 위로일 것이다. 이 주장은 주류 지식인이 사회의 청년세대 탄압을 거드는 셈이다.

 

2.안정에 성급히 삶을 걸지 마라.

본문 p.53의 주제문은 안정에 성급히 삶을 걸지 마라이다. 이 단락에서 김난도는 자격고시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안이하고 나태한 결정일 수 있다.’(p.56)고 주장한다. 아들세대의 고시 열풍의 이류를 세대 내로 한정지어 비판하는 것은 매우 상투적인 오류이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청년실업률은 사실상 22%에 달한다는 조사가 있다. 110만 명이 취업을 못한 채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IMF시대 이후 아들세대의 생계를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았기에, 매번 선거 때마다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와 복지가 공약으로 내새워졌지만 대부분 말 뿐이었다. 안정에 성급히 삶을 거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고시열풍이 부는 과정은, 이러한 아들세대의 저항과 불만을 억누르는 과정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아들세대를 안이하고 나태하게 보지 않고, 피해자로 본다면 이는 아들세대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3.부러워하지 않으면, 그게 지는 거다.

질투하는 대신 선망하라. 타인의 성취를 인정하라. 설령 그의 성공에 문제가 많아 보일지라도 그대는 오히려 그에게서 존중할 만 한 점을 애써 찾아, 그것을 배워라. 한껏 부러워해라. 그래야 이길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성취를 보고도 부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지는 것이다.’(P.81)

성공학 성격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는 위의 문장은 약육강식 자본주의 담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 주장은 아들세대를 성공한 아들과 실패한 아들로 이원화하여 청년들 간의 분열을 조장한다. 부정한 방법의 성공이더라도, 이를 선망하는 것은 현명한 것으로 가정되고 있으며, 질투하는 것은 역시나 실패할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문제가 많아 보일지라도 성공한 이를 배우라는 말은, 기득권을 유지하는 아버지세대의 힘을 공고히 하는데 협조할 뿐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위의 논리는 몇몇 젊은이들의 성공을 이끌어 낼 수 있겠지만, 전체 청년세대에게는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4.죽도록 힘든 네 오늘도 누군가에게는 염원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그대의 좌절조차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검정고시를 치르고 수능을 준비하며 만학의 꿈을 불태운다. 불가피한 이유로 자기 꿈을 접으며 배움을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인생을 생각하라.’(P.136)

이제 아들세대에게 좌절은 일종은 사치마저 돼 버렸다. 여자 친구와 이별해 좌절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래도 이혼은 것은 아니지 않느냐?’,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그래도 가방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위로하는 격이다. 그 결과 아들세대는 무기력한 집단으로 구성되며, 좌절의 자유마저 규제 받기 시작한다. 따라서 아들세대가 스스로 자신을 피해자라고 증언할 수 있도록, 아버지세대가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먼저여야 하지 않았을까?

 

5.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에 대하여

의미 없는 습관으로 굳어진 취미를 삶의 유일한 즐거움이란 식의 변명으로 감싸지는 말라.’, ‘백수가 과로사하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시간은 어쩌면 그대보다 소중하다.’ (P.199-P.212)

오늘날 청년세대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등록금, 생활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청년세대의 취약성 때문에 다단계, 성매매 등의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 돈을 버는 경우도 있다. 전국 대학생 2472명을 대상으로 '대학생 여름방학 계획을 조사한 결과 전체의 55.3%'아르바이트에 시간을 가장 많이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자아실현을 제한 받으며 생계유지를 위해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이다. 김난도는 청년세대에 대한 자기계발서를 쓰려면, 먼저 그들의 생활을 신뢰하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청년들의 시간이 청년보다 소중하다는 김난도의 주장이 참이라면,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청년들의 꿈은 김난도의 어떤 꿈보다 소중할 것이다.

 

6.찌질이 알파들

많은 찌질이 알파들이 자기는 공부 잘하고 스펙 좋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은가. 사회에 뛰어들면 밑천이 단박에 드러나 버리는 것을.’, ‘스펙 높이기를 위해 애쓰는 노력의 10분의 1만큼이라도, 나는 그대들이 인생의 지혜를 높이기 위해 관심을 두고 또 투자했으면 좋겠다.’ ‘교실 밖에서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헛똑똑이 청춘들.’(p.256-p.258)

위와 같이 김난도는 스펙은 뛰어나지만 일상생활은 형편없는 청년들을 비난한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적 역량의 한계가 아닌 구조적 문제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학벌, 직업, 재물이 전부인 것처럼 자라온 세대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는 시대와 계급, 세대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고 있다. 지금의 아들세대에게 대학 시절은 스펙 높이기 이외의 삶의 기회는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사회에서 몇몇 상류 층 청년들을 제외하고, 생존을 위한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는 것 외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아들세대의 성장기에 아버지세대의 과잉보호 역시 구조적 문제에 불을 지폈다고 본다. 따라서 아들세대의 일상생활의 수준과 대인관계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좋은 청년 일자리 창출과 청년들 간의 비경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7.아버지세대의 기득권 유지 전략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나타난 아버지세대의 인식연구를 통해, 본 연구자는 다음과 같은 아버지세대의 기득권 유지 전략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첫째, 아들세대간의 갈등을 유발함으로서, 아버지세대에 대한 비판을 종식시킨다.

둘째,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함으로서, 아들세대의 연대를 방해한다.

셋째, 성공의 어려움을 강조함으로서, 실패는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넷째, 핑계와 좌절을 감정의 사치라고 정의함으로서, 개인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다섯째, 시련과 상처가 성공의 밑바탕이라는 일관된 논리로, 아들세대의 불만을 환기 시킨다.

 

8.결론-아프기만 하면 청춘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청년세대에게 대학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기회의 공간이 아니다. 청년들에게 사회는, 생존을 위해 취업을 해야만 하는 약육강식의 공간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 담론과 아버지세대의 기득권 유지 전략이 결합하여 생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반값등록금, 반값생활비 논의가 다시 한 번 거세게 확산되고 있는 건, 아마도 현존하는 제도가 청년세대의 입장을 적절하게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청년 개인의 문제에만 집중하고, 청년세대의 입장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현대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일 수도 있다.

청년세대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책은 아프기만 하면 청춘이 아니다일 것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투영된 아버지세대의 인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인식변화를 촉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에는 취업과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는 수많은 청년들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 안에서는 청년유니온같이 연대를 통해 청년의 권리를 실현하려는 사회 운동이 꾸준히 확산되고 있다. 비록 본 연구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에 한정지었지만, 이를 확장시키고 구체화시킨다면 실제 청년운동을 지지할 수 있는 개념적 근거가 됨과 동시에 안 아픈청년이 많은 사회로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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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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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담은 틀렸다

도서 비평 2020. 10. 26. 14:28

공리주의는 효용이 개인의 삶에서부터 사회정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판단의 포괄적 기준이 되는 사상적 경향이다. 공리주의의 창시자인 벤담은 인간이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벤담이 지루함을 간과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지루함이 고통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고통과 지루함은 정반대의 개념이다.

나는 원래 인간이란 고통과 지루함을 오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군대에 복무할 때도, 훈련의 고통보다 무서운 것은 휴일의 지루함이었다. 벤담은 기본 개념 설정에서조차 틀렸다.

벤담은 쾌락을 느낀다면 효용이 증가하는 것이고, 고통을 느낀다면 효용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근시안적인 시각이다. 높은 쾌락을 겪고 나면 그에 걸맞은 허무함이 찾아오고, 높은 고통을 겪고 나면 다시 인간의 감정은 반등을 치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높은 쾌락도 높은 수준의 고통만큼 위험한 것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공리주의의 문제는, 행위의 궁극적인 기준이 항상 결과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은 논외이다. 그렇다면, 죽을 때만 행복하면 그 동안의 삶은 과정이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인가? 벤담의 말대로라면 막 살다가 마약 과다 복용으로 쾌락을 느끼며 죽으면 되는 것 아닌가?

벤담의 말대로 결과중심주의로 우리 사회가 진행되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벤담이 제시한 효용이라는 개념의 유일한 장점은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진리는 단순하다고 하지만, 벤담은 인간이 단순한 것 같다.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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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스키외가 말하는 법과 토지의 성질과의 관계는 너무 재밌다. 시대에 따라서 이렇게 사회학의 이론들이 달라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유는 산이 많고 자연 조건이 나쁜 지방에 더 많이 군림한다는 것이 현재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에는 황당한 진술이겠지만, 그 시대에는 충분히 일리 있는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의문스러웠던 것은 토지를 전혀 경작하지 않는 민족은 사치의 관념 또한 갖지 않는다는 진술이었다. 어떤 개연성을 가지고 이러한 서술이 이루어졌는지, 명확한 흐름이 잡히지 않는다. 더불어 아쉬웠던 것은, 야만민족이라는 개념이었다. 야만, 미개 등의 민족개념을 도입했을 때, 과연 그것을 나누는 기준이 어떤 관찰과 확연한 논리 구조를 통한 개념이라기보다는, 막연한 논리 구조의 개념처럼 보였다.

다음으로 제19편에서 공감이 갔던 부분은 법에 의해 설정된 것은 법에 의해 개혁하고, 생활양식에 의해 형성된 것은 생활양식에 의해 변경해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후자 역시도 법으로 개혁이 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개인이 사적인 공간까지 공적인 제도()를 통해 개혁이 된다면, 국가의 힘이 너무 강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이 문장을 가지고, 북유럽 국가들이나 우리나라를 비교해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다. (몽테스키외는 법이 간단해질 때 국민은 좋은 습속을 갖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글의 말미에 극도로 전제적인 군주정체의 역사가는 진리를 배반한다는 부분에서, 나는 한민족에 어떤 자긍심을 느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은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돼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연산군, 광해군 등의 폭군들도 함부로 기록을 열람할 수 없었던 자료라는 점에서, 우리의 기록 문화가 참 우수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한 달간 사회사상사 공부를 하며 가장 아쉬웠던 점은 번역의 아쉬움이었는데, 이번 몽테스키외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최소한 내가 영어는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사상가들의 말을 보다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더불어,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모두 국민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뭉클하기도 했다. 그러한 사상들이 현대 민주주의 초석이 됐다. 앞으로 더 젋고, 독창적인 사상가들이 현대 민주주의를 보완할 수 있기를 바란다.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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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감각을 불신하고, 진리로의 이성을 강조하였다. 이성에 대한 방법론적 회의주의를 통하여 인간이 이성적 사고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신 중심의 세계관이 아닌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다룬 철학의 시초인 것이다.

물론 신을 약화시키고 인간 중심의 사고를 확장시킨 것은 의의가 있다. 예를 들면, 왕권, 신권, 귀족권의 약화를 통해 평등사상의 기초를 닦았고, 합리성을 사회에 널리 퍼뜨렸다. 하지만 다소 아쉬운 것은 데카르트의 생각이, 우리 사회에서 인간만을 지나치게 강하게 만드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강해지다 보니까, 당연히 서양에서는 자연 위에 인간이 군림하는 모습이 당연한 것 같아 씁쓸하다. 인간이 아니라 자연 혹은 동물의 일부로 흑인들을 보았던 그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면서도 얼마큼의 죄책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데카르트가 신의 개념을 바꾸거나, 새롭게 해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신을 자연, 혹은 우주, 에너지의 덩어리, 생명 등의 개념으로 만들었다면, 인간만큼 다른 생물들이 지구에 주인이 되는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무엇이든 의심하고 의심하라"는 데카르트의 문제의식은 크게 공감한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청년은 일상 속에서 의심하는 능력을 더욱 길러야 한다.

예를 들면 내가 받고 있는 낮은 아르바이트 임금이 정말로 적절하고 옳은 것인지 의심할 수 있다. 더불어,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의심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심은 새로운 학문을 닦고, 세상에 뿌려질 아이디어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의심이 쌓이고 쌓이면,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까지 생각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러므로 사회적 감각이든 육체적 감각이든, 이러한 의심은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개념이여야 한다. 의심은 모든 행동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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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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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 - 시기심

도서 비평 2020. 10. 26. 14:21

시기심에 관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약3페이지에 달하는 글이었다. 특히, 내가 주목한 부분은 공적인 시기심에 관한 부분이었다. 베이컨은 사적인 이기심과 달리, 공적인 이기심의 긍정적인 부분에 집중했다. 공적인 시기심은 강대한 자들을 견제할 수 있는 심리적 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악의에서 불만으로, 불만에서 반란으로 이어진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공적인 시기심의 한계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심은, 공화국이나 제국 자체보다는, 주로 지위가 높은 관리나 대신에게 집중된다는 것이다.

베이컨의 주장에 나는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시기심으로 환원해서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다. 예를 들어, 부패한 관리를 비판할 때, 우리는 그 비판하는 감정을 시기심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그 관리의 위치와, 부귀영화가 부러워서 그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시기심이라고 부를 경우, 그것이 그러한 감정을 갖는 개인의 질투와 표출되지 못한 욕망으로 치환돼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시기심이 강대한 자들을 견제할 수 있는 심리적 배경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어찌 되었든 시민 대다수가, 권력을 가진 자들에 대한 강한 견제를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은 명백하다. 선거기간동안 국내의 입후보자들은, 자신의 간도 쓸개도 빼줄 것처럼 유권자들을 현혹하지만, 막상 당선이 되고나면 그러한 유권자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감정이 명명백백히 다른 것이다. 그러한 권력을 언제든지 견제할 수 있는 시선을 간직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감정이 발달해 국민소환제도 같은 견제장치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공적인 시기심이 공화국이나 제국 자체보다는, 주로 인물에게 집중된다는 사실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우리나라만을 봐도 그렇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이데올로기적, 사회구조적인 여러 문제들은 주로 특정 인물에게 집중된다. 경제가 어려우면 노무현 탓이다, 이명박 탓이다라며 대통령 한 사람을 비판하는데서 논의가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공적인 시기심을 본질적인 측면에서 우리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수준의 논의까지 끌어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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