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원칙주의

-나의 독재자 리뷰

 

메노키오.

민중사를 대변하는 카를로 진즈부르크의 대표작 [치즈와 구더기]16세기 이태리를 배경으로, ‘메노키오라는 방앗간 주인의 종교재판을 다룬다. 이단으로 고발당한 메노키오는 수도사와의 심문에서, 종교권력의 부패와 교육 불평등을 비판하고, 나아가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고 주장한다. 투옥된 메노키오는 결국 자신의 종교적 잘못을 인정하고, 아들의 석방 노력으로 방면된다. 가톨릭의 교리에 굴복한 것처럼 보였던 메노키오는, 다시 침묵을 강요하는 사제들을 비난하기 시작하고, 치즈와 구더기가 만들어지듯, 신과 천사가 만들어졌다는 독창적인 천지창조설을 이웃들에게 말하고 다닌다. 결국 또다시 고발된 메노키오는 투옥과 고문을 과정을 거쳐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메노키오를 지배한 것은 가톨릭의 교리와 죽음의 공포가 아닌, 신념에 따라 할 말은 한다는 자발적인 원칙이었다. 필자는 이처럼 타인의 강요 없이 스스로 만든 원칙을 고수하는 이를 자발적 원칙주의자라고 명명한다.

 

김성근.

이해준 감독의 [나의 독재자]에는 무명배우 김성근이 등장한다. 김성근의 꿈은 연기를 통해 당당한 아빠가 되는 것이지만, 문제는 김성근이 연기를 못한다는 것에 있다. 아들을 관객으로 초대한 연극에서, 김성근은 대사 한마디 제대로 내뱉지 못한다. 낙심한 김성근에게 1972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가상회담의 김일성 역이라는 기회가 찾아온다. 중정의 고문에도 끝끝내 역할을 뺏길 수 없었던 김성근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연기를 잘하는배우로 거듭난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은 무기한 연기되고, 중정의 가상회담팀도 해체된다. 역할에 너무 몰입했던 김성근은, 훈련이 끝났어도 스스로를 김일성이라고 믿는다.

엄마 없이 자라는 아들에게 멋있는 배우이자 좋은 아빠이고 싶었던 김성근의 간절함이, 스스로를 일상의 생각과 행동마저 김일성이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한 김성근의 원칙은 정신이상의 과정을 거쳐, 급기야 월북을 시도하게 만들고, 그 일을 수습하느라 고입시험마저 볼 수 없었던 아들은, 괴물이 된 김성근을 원수처럼 원망한다. 김성근 역시 스스로 부여한 규율을 고수하다가, 삶의 존재이유였던 아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 원칙주의자인 것이다. 하지만 김성근에게 자발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가상회담팀을 이끌던 중정의 오계장의 말이 계속 귀에 걸린다.

난 네가 김일성인지 아닌지 관심 없어 이 새끼야. 내가 김일성이라고 하면 넌 그냥 김일성이야, 새끼야.”

 

김태식.

김성근에게는 아들 김태식이 있다. 아빠에게 가장 아끼는 딱지를 선물하고, 중정에 감금 돼 있다가 돌아온 아빠를 울며 끌어안던 김태식은, 다단계사원으로 성장한다. 돈이 목숨이라며 열변을 토해내는 김태식에게는 정신이 이상한 아빠도,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된 내연녀도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김태식에게 쌓이는 것은, 돈이 아닌 빚이다. 빚을 청산하기 위해 아빠 소유의 집이 필요했던 김태식은, 정신이 나간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된다.

돈만을 추구하기로 마음먹을 수밖에없었던 엇나간 원칙주의자에게 효도, 사랑, 자아실현이라는 가치는 수단일 뿐이다.

 

()자발적 원칙.

메노키오는 공상 속에서 자신을 순교자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메노키오에게 변질된 이단은, 오히려 재판관들이었다. 재판관들을 향해 자신의 철학을 역설하던 메노키오의 자발적 원칙은, 오백년 후 진즈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라는 책으로 돌아왔다.

 

1994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드디어 김성근은 가상회담의 김일성으로, 청와대라는 무대에 오른다. 김성근에게는 리허설도 대본도 필요 없었다. 자신이 김일성보다 더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처럼 김일성의 사상을 역설하는 김성근에게 불쾌해진 대통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김성근은 아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던 연극 [리어왕]의 대사를 연기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날 카메라를 통해 아빠의 연기를 지켜보는 김태식도 울고 있었다. 며칠 후 아빠가 죽고, 집마저 잃은 김태식에게 남은 것은 사랑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내연녀를 찾아가던 순간, 돈만을 추구하던 김태식의 원칙은 사라졌다.

결국 김성근·김태식 부자의 비자발적 원칙이 사라지는 순간은, 원칙 깊은 곳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경험했을 때이다.

 

나의 독재자.

혁명. 자급자족. 충성.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예술. 자본주의. 국가.

나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누구의 목소리일까.

당장 총살 시키라. 수령은 아버지야. 돈은 목숨이야. 인민은 인민답게. 미제 물건 치우라.

그 목소리가 지시하는 원칙은 자발적인가.

위태롭던 김성근·김태식 부자가 청와대를 나와, 분당을 지나, 남해로 내려갔다. 아빠는 죽었지만, 아들은 태어날 것이다. 김태식이 아들에게 보여줄 연기는 리어왕일까, 김일성일까.

 

그것이 꿈이라면 다시는 깨지 않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나의 독재자.

'영화 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무산일기  (0) 2020.10.26
영화 국경의 남쪽  (0) 2020.10.26
여배우를 위한 변명  (0) 2020.10.26
목소리의 형태  (0) 2020.10.26
영화 25시  (0) 2020.10.26
Posted by 이탁연
,

사라진 시간 사라질 시간

-최미아의 구조장비(대안공간 눈) 리뷰

 

1

시간은 상대적이다. 지루한 수학 강의를 듣는 학생이 체감하는 시간과, 흥미진진한 SF영화를 보는 관객이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는 차이가 크다. 최미아의 구조장비에 입장했을 때, 필자의 시간은 비약적으로 느려졌다. 시간을 잃고 망연히 우주를 떠도는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시간을 낙후하게 만드는 전시에 힘을 불어넣어 줄 어떤 장비도 내겐 없었다.

416. 누군가는 세련된 백을 선물 받아 기뻤고, 누군가는 급하게 삼겹살을 먹다가 체했고, 누군가는 이사를 가서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모든 감정을 뒤로 한 채, 인생의 시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날 시간이 멈춘 아이들을 구해줄 장비는 너무 늦게 나타났다.

시간이 사라진 그들의 부모들이 거리로 나섰다. 부모들의 시간도 자녀들처럼 그날에 멈춰있다. 푸르게 자라던 나무는 검게 물들었고, 부모는 멍한 새처럼 죽은 나무를 바라볼 수밖에 없을 뿐이다.(black still life in, 2014) 왜 아이들은 죽어야만 했을까? 아이들을 구하려던 장비는 모두 사용할 수 없게 잘려 있었고(the true rescue equipment, 2009),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었다.

미국이 상징하는 자본주의는(pax americana) 우리가 효율, 이윤, 독점을 추구하도록 독려했고, 배려, 나눔, 안전 등의 가치는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의 심장은 미국적 자본주의로 새빨갛게 달아올랐고(pax americana), 이런 세태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는 학계로 한정돼 진행될 뿐이었다. 오히려 사건이 터지지 않고 시간이 평화롭게 흘렀다면, 더 이상하게 생각됐을 정도이다. 19941021일 잘린 다리 앞에서, 1995629일 무너진 건물 앞에서, 우리는 시간이 멈춘 이들을 처연히 목도해야 했다. 그로부터 스무 해가 지난 2014416일 진도의 고요했던 항구 에서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달라진 것은, 없다. 결국 스스로 각자도생하여 탈출하는 것 외에,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별다른 방법은 없지 않겠는가.(나에게 보내는 선물)

 

거울을 마주한다. 나르시스가 본 아름다운 자화상도, 동주가 만난 밉지만 그리운 자화상도, 미당의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말하는 추억을 덧 씹는 자화상도 아닌, 삽 모양의 거울에 부끄러운 내가 있다.

너는 뭘 했는데? 커피나 마시며 뉴스를 즐기던 네가, 무슨 자격으로 사회를 비판하는데? 부채감을 떨어뜨리려 촛불을 들었고, 이제는 그것마저 시들해지니 옷깃만 여민 채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는 너는 뭐가 그렇게 다른데?”

손잡이만 남은 각양각색의 삽들이 대안공간에 피었다. 싸늘한 가을을 맞은 이 삽들은 나와 당신이다. 화사한 태로 도시를 수놓는 손잡이는, 정작 사고 현장의 무거운 돌 하나도 들어내지 못하는 쭉정이일 뿐. 당신이 지금처럼 현실을 외면하면, 세상은 핏빛의 쭉정이들만 가득할 것이다.(빨간 안경, 2013)

 

2

예술의 사회적 역할, 참여, 저항 등의 대한 담론과 논쟁들이 촌스러워진 시대이다. 소위 소재’, 의제로 쉽게 창작하고 기획했다가는, 관객과 평단에게 문제를 그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했냐며 씹히기 십상이다. 이번 전시는 대안공간, ‘구조장비 등 현재 우리 사회의 주요 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안공간 눈의 전시가, 주요 미술관의 전시와 어떤 차별성을 갖고 있는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지방에, 골목에, 무료로 전시된다고 대안이라는 단어를 붙인 걸까? 캔버스 바깥의 예술이, 캔버스 안의 예술을 살린다. 관객은 전시도 보지만, 미술관도 본다. 골목을 걷다가 고개를 쭈뼛거리며 들른 관객이, 대안공간 눈이 추구하는 주안점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공간 운영의 묘가 있다면, 최미아의 구조장비들을 더욱 또렷하고 실감나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

 

1-1

전시를 관람하고 나오며 원래의 시간을 찾은 필자가 늦은 밤 모니터 앞에 앉았다. 작가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구조장비는 무엇일지 안경을 벗고(빨간 안경, 2013), 생각해본다. 평안과 상상의 늪에 빠져 결코 구조되지 못할, 뒤틀리고 발칙한 시간이란 존재할까. 그런 시간은 황망해서 사라진 시간이 아닌, 즐거워서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시간이겠지. 먼 후일에 구조장비를 타고 그 시간, 오고야 말 것이다. 대안공간에서, 제주를 향하는 바닷길에서, 부모의 지친 발이 디디고 선 광장에서.

 

Posted by 이탁연
,

충무로의 젊은 여배우 기근 현상이 뚜렷하다. 90년대 후반 심은하-고소영-전도연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교차적으로 장악했던 트로이카 시기 이후, 연기력과 티켓 파워를 함께 갖춘 젊은 여배우들이 동시에 활약한 시기는 없다. 씨네21의 표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몇몇 여배우들의 농밀한 페르소나는, 몇 년 후 어김없이 책장의 어두운 칸으로 자리를 옮겼고, 대중의 온기 가득한 손은 남성 배우와 스타 감독의 차지가 됐다. 마지막까지 여배우 곁을 지키리라 믿었던 삼촌들역시 소녀시대의 젖가슴 사이에, 김연아와 손연재의 가랑이 사이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필자의 눈에는 잊힌 여배우들의 이 더욱 크게 보인다.

 

김소영은 남성들은 더 본질적인 여자, 따라서 극복 가능성이 원천 봉쇄된 여성들과의 만남으로 보다 바람직한 남성성을 회복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주장을 빌려, 충무로 여배우 기근현상의 속살을 들춰보자. 남성의 뜨거운 시선이 스크린에서, 여성 아이돌 그룹과 스포츠스타들에게 전면적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부터이다. 이 시기는 신권위주의 체제인 MB정권의 등장, 불평등의 심화, 심지어 가정 내에서조차 드러나는 경쟁 등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억압기제가 서로 맞물리며, 스스로를 도태된 삼포세대로 명명하는 사회적 약자 계층의 광범위한 확산을 가져온 때이다. “소녀들을 향한 삼촌세대의 증가와 동시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의 스크린 속 여배우들은, 상처받은 가학적 남성 관객이 기대하는 극복 가능성이 원천 봉쇄된소녀의 모습에 충실하지 않았다. 핫팬츠를 입고, “오빠, 소원을 말해봐.”라고 말하는 수동적이고 자학적인 소녀도 있었지만, 필자의 뇌리에는 자신과 딸을 학대하던 남편과 시어머니를 흉기로 내리치는 김복남(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 딸과 함께 중산층 가정의 집을 빼앗으려는 주희(숨바꼭질, 2013) 등 남성보다 더 가학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뚜렷하다. 나아가, 납치돼 아저씨만을 기다리던 진짜 소녀김새론(아저씨, 2010)은 자신을 괴롭히던 할머니와 의붓아버지를 죽게 만들거나, 감옥에 가게끔 어른들을 속이는 영악함을 가진 소녀로 성장한다.(도희야, 2014)

 

올해 개봉했던 문제작도희야를 좀 더 들여다보자. 도희를 도와주는 파출소장인 영남 역시 여성이다. 영남은 레즈비언이라는 성정체성으로 인해, 지방으로 좌천됐다는 점에서 도희와 소수자적 특성을 공유하며, 도희와 자연스러운 연대를 통해 마을(사회)의 부조리한 이데올로기에 대응한다. 도희와 영남이 기존의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들과 가장 뚜렷하게 대비되는 지점은, 비자발적 억압상황을 초탈하거나 오히려 즐기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특히, 도희의 경우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매일 밤 방파제에서 춤을 춘다. 잔혹함과 평화로움, 유머와 고통이 도희를 동시에 교차하며, 한국 여성 캐릭터의 새로운 진화를 보여준다.

 

이처럼 한국 여성영화의 성장은, 역설적으로 젊은 여배우 기근 현상의 전후 맥락이다. 전통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 관객에게 의존했던 영화산업임에도 불구하고, 1960-90년대 중대한 여성문제였던 노동 착취는 한국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없었다. 문화 경합의 과정의 승자가 여성을 억압하고자 하는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 여성권에 대한 대중의 보편적 이해의 확산은, 고무신 관객, 아줌마 관객, 손수건 부대 등 스크린 외부에 남아있던 여성 관객 비하 용어들마저 사어로 만들었다.

 

이제 주사위는 다시 관객의 몫이다. 충무로의 여배우들은 도태된 적이 없다. 그들은 시대가 원하는 여성 캐릭터를 훌륭히 표현했다. 순수와 섹시라는 양자택일의 유형에서 한 단계 발전했다. 필자는 더 잔인하고 악랄한 여배우와, 그녀를 노려보며 야무지게 팝콘을 깨무는, 배우보다 무서운 관객을 원한다.

'영화 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국경의 남쪽  (0) 2020.10.26
자발적 원칙주의 - 나의 독재자 리뷰  (0) 2020.10.26
목소리의 형태  (0) 2020.10.26
영화 25시  (0) 2020.10.26
자본주의  (0) 2020.10.26
Posted by 이탁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