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시간 사라질 시간

-최미아의 구조장비(대안공간 눈) 리뷰

 

1

시간은 상대적이다. 지루한 수학 강의를 듣는 학생이 체감하는 시간과, 흥미진진한 SF영화를 보는 관객이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는 차이가 크다. 최미아의 구조장비에 입장했을 때, 필자의 시간은 비약적으로 느려졌다. 시간을 잃고 망연히 우주를 떠도는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시간을 낙후하게 만드는 전시에 힘을 불어넣어 줄 어떤 장비도 내겐 없었다.

416. 누군가는 세련된 백을 선물 받아 기뻤고, 누군가는 급하게 삼겹살을 먹다가 체했고, 누군가는 이사를 가서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모든 감정을 뒤로 한 채, 인생의 시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날 시간이 멈춘 아이들을 구해줄 장비는 너무 늦게 나타났다.

시간이 사라진 그들의 부모들이 거리로 나섰다. 부모들의 시간도 자녀들처럼 그날에 멈춰있다. 푸르게 자라던 나무는 검게 물들었고, 부모는 멍한 새처럼 죽은 나무를 바라볼 수밖에 없을 뿐이다.(black still life in, 2014) 왜 아이들은 죽어야만 했을까? 아이들을 구하려던 장비는 모두 사용할 수 없게 잘려 있었고(the true rescue equipment, 2009),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었다.

미국이 상징하는 자본주의는(pax americana) 우리가 효율, 이윤, 독점을 추구하도록 독려했고, 배려, 나눔, 안전 등의 가치는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의 심장은 미국적 자본주의로 새빨갛게 달아올랐고(pax americana), 이런 세태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는 학계로 한정돼 진행될 뿐이었다. 오히려 사건이 터지지 않고 시간이 평화롭게 흘렀다면, 더 이상하게 생각됐을 정도이다. 19941021일 잘린 다리 앞에서, 1995629일 무너진 건물 앞에서, 우리는 시간이 멈춘 이들을 처연히 목도해야 했다. 그로부터 스무 해가 지난 2014416일 진도의 고요했던 항구 에서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달라진 것은, 없다. 결국 스스로 각자도생하여 탈출하는 것 외에,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별다른 방법은 없지 않겠는가.(나에게 보내는 선물)

 

거울을 마주한다. 나르시스가 본 아름다운 자화상도, 동주가 만난 밉지만 그리운 자화상도, 미당의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말하는 추억을 덧 씹는 자화상도 아닌, 삽 모양의 거울에 부끄러운 내가 있다.

너는 뭘 했는데? 커피나 마시며 뉴스를 즐기던 네가, 무슨 자격으로 사회를 비판하는데? 부채감을 떨어뜨리려 촛불을 들었고, 이제는 그것마저 시들해지니 옷깃만 여민 채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는 너는 뭐가 그렇게 다른데?”

손잡이만 남은 각양각색의 삽들이 대안공간에 피었다. 싸늘한 가을을 맞은 이 삽들은 나와 당신이다. 화사한 태로 도시를 수놓는 손잡이는, 정작 사고 현장의 무거운 돌 하나도 들어내지 못하는 쭉정이일 뿐. 당신이 지금처럼 현실을 외면하면, 세상은 핏빛의 쭉정이들만 가득할 것이다.(빨간 안경, 2013)

 

2

예술의 사회적 역할, 참여, 저항 등의 대한 담론과 논쟁들이 촌스러워진 시대이다. 소위 소재’, 의제로 쉽게 창작하고 기획했다가는, 관객과 평단에게 문제를 그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했냐며 씹히기 십상이다. 이번 전시는 대안공간, ‘구조장비 등 현재 우리 사회의 주요 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안공간 눈의 전시가, 주요 미술관의 전시와 어떤 차별성을 갖고 있는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지방에, 골목에, 무료로 전시된다고 대안이라는 단어를 붙인 걸까? 캔버스 바깥의 예술이, 캔버스 안의 예술을 살린다. 관객은 전시도 보지만, 미술관도 본다. 골목을 걷다가 고개를 쭈뼛거리며 들른 관객이, 대안공간 눈이 추구하는 주안점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공간 운영의 묘가 있다면, 최미아의 구조장비들을 더욱 또렷하고 실감나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

 

1-1

전시를 관람하고 나오며 원래의 시간을 찾은 필자가 늦은 밤 모니터 앞에 앉았다. 작가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구조장비는 무엇일지 안경을 벗고(빨간 안경, 2013), 생각해본다. 평안과 상상의 늪에 빠져 결코 구조되지 못할, 뒤틀리고 발칙한 시간이란 존재할까. 그런 시간은 황망해서 사라진 시간이 아닌, 즐거워서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시간이겠지. 먼 후일에 구조장비를 타고 그 시간, 오고야 말 것이다. 대안공간에서, 제주를 향하는 바닷길에서, 부모의 지친 발이 디디고 선 광장에서.

 

Posted by 이탁연
,

오웬

사회 비평 2020. 10. 26. 14:32

오웬의 말처럼 통치의 목적은 지배를 받는 사람과 지배자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배를 받는 사람과 지배자 모두 불행한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지배자와 피지배자,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불신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바꿔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웬의 말처럼 변하지 않는 일관성으로 참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참된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그것이 존재한다는 가정부터 참이어야 오웬의 신성한 것만을 가르치자는 주장으로 논의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세상에 변하지 않는 참된 것이 존재한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렇기 때문에 범죄를 가르치는 법률을 폐지하자는 그의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금 같은 지구촌 사회에 법이 없다면? 오웬이 살던 시대만 해도 꽤 큰 덩어리로 사회가 존재했는데, 법을 없앤다면 더 큰 혼란이 있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단군조선시대 때도 8조금법이라는 것이 존재했는데? 사회의 크기에 따라 법률의 필요성이 증가하므로, 오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웬의 교육에 대한 주장들을 보며, 지지난 대선에서 평생교육을 주장했던 문국현 전 의원, 곽노현, 김상곤 교육감 등이 생각났다. 오웬이 현재 우리나라에 있다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분명히 진보교육감으로 출마하겠지. 그런데 현재 서울교육감인 문용린을 이길 수 있을까? 위대한 지도자를 갖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위대함이 아니라, 지도자의 위대함을 알아보는 시민들의 안목이라는 점에서, 나는 오웬이 문용린에게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그가 당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들을 고민하고 제안한 것은 높이 평가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원론적인 점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에서 아쉽다. 또한 진리에서 법률로, 법률에서 교육으로, 교육에서 일자리로 나아가는 그의 글의 화두가 다소 유연하게 연결되지 못하는 것도 안타깝다.

반면에 꼭 오늘자 신문의 칼럼을 읽는 것처럼,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그의 이야기를 보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오웬은 시대를 관통하는 위대한 학자구나가 전자요, 교육과 일자리를 비롯한 사회의 전 분야에서의 진보는 당연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가 후자다.

Posted by 이탁연
,

루소

사회 비평 2020. 10. 26. 14:30

문명과 예술의 발전이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루소의 주장에 일부 공감한다. 하지만 과학이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 어긋난다는 주장은 동의하면서도, 예술이 사치와 허영의 근원이자 결과라는 주장은 인과를 따져보아야 할 것 같다.

보다 본질적인 부분은 문명과 예술의 부정이 아니라, 문명과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가가 아닐까 싶다. 과학과 예술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향유하고 어떤 가치 지향점을 추구하는 형태로 발전시킬지를 논의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고 필요해 보인다. 어쩌면 루소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자연의 돌연변이 정도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불어 예술이란 항상 생활에 여유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주장은 틀렸다. 그것은 성향과 선택의 문제이다. 특히, 오늘날은 웰빙을 추구하는 가난한 예술가들도 많다. 예술이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는 서술도 불편하다. 예술은 사회를 비판하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기능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허영과 인간불평등에 대한 그의 서술에는 동의한다. 많은 부분이 현재 내 삶을 성찰하게 했다. 물질, 인정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루소가 주장했던 일반의지와 법률에 대한 주장은 동의하지만, 법률을 만드는 사람들, 법률을 실행하는 사람들의 힘이 너무 강하게 설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과학과 문명을 비판하면서도, 법률을 강조하는 루소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문명화된 사회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우니 법을 통해 최소한의 인간의 자유라도 확보하자는 루소의 타협안일까? 그렇다면 루소는 과학과 예술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댔어야 옳다. 다시 원시 상태의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과학과 예술의 순기능도 법률처럼 일반의지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이탁연
,

지난해부터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지역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 중의 하나인 지자체, 그보다 더 작은 마을 혹은 동네에 대해. 내가 관심있는 지역의 면적은 시간에 비례하여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아이를 낳고서부터인 것 같다. 아이는 부모가 낳고 키우지만, 넓게는 동네의 여러 기운과 정을 먹고 자란다. 나는 공동체 의식이 강한 시골에서 낳고 자랐기 때문에 동네의 따뜻한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 그 정다움이 나를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시켜준 것 같다.

어른이 됐고 도시에서 살고 있는 지금, 시골의 흙내음도 할머니 사투리도 없는 우리 동네에는 어떤 청년들이 살까, 내가 매일 길가에서, 지하철역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는 우리 동네의 친구들은 어떤 화두를 갖고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지역의 청년 공동체에 가입하였다. 내가 첫발을 디딘 지역 청년 행사는 ‘2018년 중랑청년네트워크 송별회였다. 그리고 그 행사가 열린 곳이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중랑구의 유일한 마을활력소 마중이다.

 

마중은 서울 동북부의 끝에 있다. 경춘선과 중앙선이 지나가는 망우역 1번출구에서 나와 왼편으로 걸어가다보면 두 번째 골목에 마중이 마중나와있다. 역에서 채3분이 걸리지 않을만큼 접근성이 좋다.

 

마중을 수식하는 마을활력소는 서울특별시 조례에 의해 만들어진,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주민이 직접 주도하여 조성부터 운영까지 참여하는 공간을 말한다. 마을활동의 거점으로 생활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장소라는 서울특별시의 홍보 문구는 마중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을까?

 

마중은 크게 네 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있다. 마중11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고, 마중215명까지 수용이 가능하고 부엌과 스크린을 사용할 수 있다. 마중+는 온돌로 된 좌식공간으로 5명까지 이용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마중을 운영하는 중랑마을지원센터의 운영사무실이 있다. 전체공간을 한번에 대관하는 것도 가능하다. 마중은 평일 10시부터 18시까지 이용이 가능하다. 야간과 주말에는 인력 운용에 어려움이 있어서 대관을 하지 않는다. 예약을 통해 대관이 진행되며, 비용은 무료이지만, 영리 목적의 모임은 대관해주지 않는다.

 

마중을 운영 중인 중랑마을지원센터는 마중이라는 공간을 활용하여, 지역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하며 살아가는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크게는 주민들이 마을공동체 공모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홍보하는 공모사업 지원, 마을활동가 및 주민 교육, 주민들이 만나 관계를 맺고 행동하며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네트워크 활동, 마을 활동을 알리기 위한 홍보물을 제작하여 마을 소식을 알리고, 마을 자원을 조사하여 안내하는 미디어 활동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중랑마을아카데미를 시작하여 마을생활과 자치에 관한 강의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본 에세이를 위해 만난 마중의 최정희 대표는 공간을 살아 숨쉬는 유기체라고 표현하였다. 그녀는 이어서 이 유기체가 활력의 기운을 내뿜기 위해서는 결국 공간을 운영하는 운영자의 애정이 중요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다만 지속적인 애정을 위해서는 공간 운영자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필요하다는 점도 잊지 않았다.

 

Posted by 이탁연
,

처음 공릉행복발전소를 봤을 때는 생각보다 큰 크기에 놀랐다. 흰색 벽면이 사선 모양으로 물결치듯 보이는 외부 모습은 발전소라는 이름에 걸맞은 역동성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이제 갓 세 살이된 공릉행복발전소는 얼마나 많은 행복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것일까.

 

공릉행복발전소는 총 3개의 층으로 이루어져있다. 1층에는 북카페 수다”, 1층과 2층에는 공릉도서관”, 3층에는 구립공릉행복지역아동센터가 있다.

 

2층 공릉도서관 회의실에서 한윤경 위원장을 만났다. 그녀가 생각하는 공릉행복발전소는 주민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 이웃 간 기쁨과 위로를 함께 나누는 공간, 주민들에게 일상의 놀이터 같은 공간이었다.

 

그녀는 이를 위해 공간 운영에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자원활동가들은 자원활동 의사를 밝힌 직후 바로 현장에 투입이 된다. 반면에 공릉행복발전소에서는 자원활동신청서를 접수하고 나서, 그후에 운영위원 및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상견례를 하고, 그리고 나서 공간 운영에 대한 교육을 실시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본 공간이 추구하는 가치를 참여자들이 자연스럽게 습득하도록 돕는다.

 

끝으로 한윤경 위원장은 서울시 공동체 공간의 발전과 활성화를 위해 지방정부에서 공간 운영자들에게 힘을 많이 실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가끔 일부 공무원과 지역 주민들에게 서운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공릉행복발전소 자원활동가들을 놀고 있는 어머니들정도로 생각하고 폄하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서로 간의 존중이 상생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이탁연
,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의 성공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유사한 형식의 사회적 참사 조사위원회였으면서, 여러 내·외부적인 논란이 있었던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반추하고 시사점을 도출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 연구는 이러한 배경과 목적 하에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와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를 비교 분석하였다.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 연구는 먼저 사회적 재난 조사위원회에 대한 이론을 고찰하고, 이어서 조사위원회의 성공적인 활동을 담보할 수 있는 독립성과 전문성을 기준으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와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를 비교 분석하였다. 또한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참여했던 관계자들로부터,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한 목적의 인터뷰를 진행하였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연구 및 분석을 통해 시사점을 도출하여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한 정책 제안을 하였다.

 

세월호 특조위 관계자 관련 자료 수집은 20204월부터 20208월까지였으며, 자료 수집 방법은 관계자와의 심층면담 및 그룹 인터뷰 등이다. 인터뷰 시간은 최장 5시간까지 진행하였고, 인터뷰 내용에 대하여 사실 여부를 검토받았다. 주요 내용은 위원회 내 갈등, 조사 역량 강화 필요, 외부에서 위원회를 향한 비판, 유가족 및 피해자와의 건설적인 유대 필요, 조사관 처우 개선, 위원회의 성과와 한계, 5.18진상조사위를 위한 제언 등이었다.

 

연구 결과, 두 조직의 독립성 차원에서 공통점은 피해자 친화적인 위원장을 두었다는 점이었고, 차이점은 활동하는 시기의 정권이 5.18진상조사위는 위원회에 친화적인 반면, 세월호 특조위는 당시 정권과 극렬한 갈등을 빚었다는 점이다. 전문성의 공통점 차원에서 두 조직은 법률 전문가 위주로 위원들이 위촉되어 기본적인 조사의 전문성을 갖췄음을 알 수 있으나, 위원회 차원의 조사 권한이 약하다는 한계 역시 동시에 가진다. 반면, 전문성의 차이점 차원에서 세월호 특조위의 경우 세월호 참사의 특성 상 선박 및 해양 분야 전문가가 위원으로 참여할 필요성이 높았는데, 법률 전문가 위주로 위원들이 위촉되어 선박 및 해양 조사 관련 전문성이 낮았다. 그러나 5.18진상조사위의 경우 5.18민주화운동 관련 활동가, 현대사 등 학계, 국방, 경찰, 법률, 언론 등의 전문가들이 골고루 위원으로 위촉돼 전문성 면에서는 세월호 특조위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또한 조사기간 역시 세월호 특조위는 약 12개월 간 활동하였지만, 5.18진상조사위2년이 보장되고, 최대 3년까지 가능하여 보다 전문적인 조사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 토대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에 제안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사관들을 최대한 확보하고, 조사관들을 위한 지속적인 조사기법 및 조사윤리 등의 훈련이 진행돼야 하며, 선진적이고 과학적인 조사 기술이 위원회 차원에서 도입돼야 한다. 둘째, 조사관들을 비롯한 조사위원들 역시 스스로 조사에 대한 강한 내적동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책임과 권한을 행사해야 하고, 조사 사건의 수를 최소화하되 중요한 사건 위주로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셋째, 조사에 협조적인 조사대상자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사면과 복권을 관계기관에 건의해야 한다. 셋째, 조사활동과 더불어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의 대국민 홍보도 적극적으로 병행돼야 한다. 넷째, 유가족 및 피해자들과 정기적으로 소통하고 교류하며, 가능한 범위에서의 사건 조사 과정은 공유하여 건설적인 유대를 이어나가야 한다. 다섯째, 위원회 차원에서 조사관들에 대한 심리 지원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본 연구는 세월호 특조위와 5.18진상조사위의 구조와 운영을 정성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5.18진상조사위의 활동을 제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본 연구는 5.18진상조사위를 비롯한 사회적 참사를 조사하는 한시적 위원회들의 발전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이며, 그러한 위원회들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향상시키는 데에 의미있는 역할을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본 연구가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 활동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와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비교 연구_이탁연.pdf
0.31MB

Posted by 이탁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