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웬

사회 비평 2020. 10. 26. 14:32

오웬의 말처럼 통치의 목적은 지배를 받는 사람과 지배자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배를 받는 사람과 지배자 모두 불행한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지배자와 피지배자,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불신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바꿔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웬의 말처럼 변하지 않는 일관성으로 참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참된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그것이 존재한다는 가정부터 참이어야 오웬의 신성한 것만을 가르치자는 주장으로 논의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세상에 변하지 않는 참된 것이 존재한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렇기 때문에 범죄를 가르치는 법률을 폐지하자는 그의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금 같은 지구촌 사회에 법이 없다면? 오웬이 살던 시대만 해도 꽤 큰 덩어리로 사회가 존재했는데, 법을 없앤다면 더 큰 혼란이 있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단군조선시대 때도 8조금법이라는 것이 존재했는데? 사회의 크기에 따라 법률의 필요성이 증가하므로, 오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웬의 교육에 대한 주장들을 보며, 지지난 대선에서 평생교육을 주장했던 문국현 전 의원, 곽노현, 김상곤 교육감 등이 생각났다. 오웬이 현재 우리나라에 있다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분명히 진보교육감으로 출마하겠지. 그런데 현재 서울교육감인 문용린을 이길 수 있을까? 위대한 지도자를 갖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위대함이 아니라, 지도자의 위대함을 알아보는 시민들의 안목이라는 점에서, 나는 오웬이 문용린에게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그가 당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들을 고민하고 제안한 것은 높이 평가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원론적인 점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에서 아쉽다. 또한 진리에서 법률로, 법률에서 교육으로, 교육에서 일자리로 나아가는 그의 글의 화두가 다소 유연하게 연결되지 못하는 것도 안타깝다.

반면에 꼭 오늘자 신문의 칼럼을 읽는 것처럼,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그의 이야기를 보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오웬은 시대를 관통하는 위대한 학자구나가 전자요, 교육과 일자리를 비롯한 사회의 전 분야에서의 진보는 당연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가 후자다.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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