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0.10.21 연대하라 - 최진영의 소설집 팽이

연대하라

 

고립과 경쟁

 

우리는 경쟁사회에 살고 있다. 참혹한 경쟁사회에서는 호혜와 평등이라는 말이 정치인들의 허깨비 같은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형제, 자매, 남매, 부부 등 가족 간에 경쟁도 집 밖 사회에서의 경쟁 못지않을 만큼. 여기, 경쟁과 고독이 최극점에 달한 포스트IMF시대에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작가 최진영이 있다. 실천문학과 한겨레문학을 통해 데뷔한 그녀는, ‘한겨레에 어떤 실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최진영의 첫 단편집 팽이에 수록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고립되어있다. 인물들의 스트레스는 위로받아야 할 가족들과의 갈등으로 증폭된다. 엘리에서 코끼리 엘리와 함께 산 아래 외딴집에 사는 주인공 나, 어디쯤에서 아버지, 어머니, 여자친구에게 무능한 인간으로 취급받는 주인공 나, 주단에서 서로 다른 능력으로 태어나 극한 심리적 와해를 겪는 주와 단.

주요 인물들이 10대에서 30대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팽이를 오늘날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소설집으로 분류해도 무방할 듯하다. 실제로 1981년에 출생해서 오랜 학원 강사 경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의 프로필을 봤을 때, 젊은 세대에게 애정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뚜렷한 성과를 달성하고 있는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작가가 눈에 띄지 않는 요즈음, 최진영의 목소리는 그래서 더 소중하고,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많은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팽이의 세 번째 수록작품 어디쯤현대문학20123월호에 처음 발표되었다. 1인칭주인공시점으로 서술되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나는 아버지가 그려준 약도를 보고 성원빌딩을 찾아가야 한다. 주인공은 가보면 좋을 거라는 아버지의 말만 듣고 지하철역에서 나와 성원빌딩을 찾아가지만, 그가 올라오자마자 지하철역은 사라지고 만다.

사라진 지하철역은 편하게 집으로 돌아갈 곳이 없는 현대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 돌아갈 집에는 그가 공무원에 합격하길 바라며 그를 닦달하는 어머니와, 그를 불명확한 목적지로 가라고 재촉하는 아버지만이 있을 뿐이다. 지하철역 출구가 우리가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어머니의 따뜻한자궁이라면, 아버지는 우리가 목적도 없이 성장지상주의에만 빠져들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길을 잃고 배가 고파 편의점에 들어간 주인공은 미성년자 직원에게 호감을 갖는다. 아직은 가정과 사회에 걸쳐진 미성년자에게 주인공은 어떤 안도감이나 순수함을 느꼈던 것일까. 하지만 그 미성년자도 자기처럼 언젠가는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헤매게 될 것이다.

주인공이 여섯시에 퇴근해서 자정까지 헤매며 만난 행인들도 역시 주인공처럼 이 동네를 낯설어했고, 헤매고 있었고, 다른 길을 알려주기도 했다. 고립된 개인들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주인공이 도착할 성원빌딩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 즉 이데올로기적 오인이었던 것이다. 일이 생긴 여자친구에게 가봐야 하는 상황에서 만난 행인도 주인공에게 다음과 같은 말만 할뿐이다. “여기서 나갈 생각을 말라는 거죠.”, “그렇게 자꾸 의심할 거면 따라오지 마요. 각자 가자고, 각자.” 아버지가 가라고 한 곳을 가야만하는 과잉억압시대에, 행인들은 가고만있는 실행원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성원빌딩은 누구의 성원으로 만들어진 빌딩인가? 몽환적인 동네와 알 수 없는 행인들의 반응은, 독자들에게 우리 사회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느끼는 혼란을 똑같이 체험하게 한다. 질문은 독자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 돼 버린다. 사회가 가라고 재촉하는 유토피아는 어디에 있는가? 왜 아무도 이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나처럼 헤매는 사람들을 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불안과 혼란과 가난으로 점철된 이 사회를 빠져나가야 하는 것일까? 팽이의 다른 두 수록작품 엘리주단에서 작가의 대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어른들의 대한민국

 

팽이의 다섯 번째 수록작품 엘리문학동네2011년 가을호에 처음 발표된 작품이다. 엘리는 코끼리와 동거하는 무능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서는 아버지세대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직접적으로 서술된다. 먼저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난 이제 겨우 스물여덟살인데, 사람들은 내가 스물여덟살 먹도록 이뤄놓은게 하나도 없다고 비난한다. 여태 뭐 하고 살았느냐고 비아냥거린다. 이미 늦었다고 단정하면서도, 때론 대갈빡에 피도 안 마른 놈이라고 애 취급이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라는 건지.(팽이, 124-125)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고, 사랑은 밥 안 먹여주고, 젊을 때 바짝 돈 안 벌고 뜬구름만 잡다보면 늙어서 고생하고,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침묵해야만 하고, 일등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금지되는 게 세상의 룰이라면 나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팽이,133-134)

 

대학에 안 가겠다고 했을 때, 아빠가 전문대라도 가라고 했다. 전문대 가서 이년을 놀더라도 고졸이랑은 급이 다르다고, 초봉부터 차이가 난다고 그 말이 너무 웃기게 들렸다. 결국 급을 결정하는 건 돈이란 말이었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다. 아빠랑 다투다가 확 뒈져버릴 거라고 소리 지르고 집을 나왔다.(팽이, 140-141)

 

엘리에서 주인공 나는 코끼리 엘리가 너무 많이 똥을 싼다고 생각하고, 엄마는 주인공보고 할 줄 아는 게 먹고 싸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한다. 엘리는 이처럼 주인공의 여러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주인공의 꿈은 영화감독인데, 그가 만든 씨놉시스 내용은 코끼리를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려고 하는 한 남자의 고군분투이다. 남자는 국가, 밀수업자와 싸워야하지만, 자기를 나쁜 놈인 줄 알고 도망치는 코끼리와도 사투를 벌인다. 결국 남자는 헷갈리게 되는데, 이러한 남자의 혼란스러운 모습은 결국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과 닮아있다. 주인공은 기존의 관습과 제도(씨놉시스에서는 국가, 밀수업자) 밖의 행복(씨놉시스에서는 아프리카)을 찾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욕망이 헛된 이상이지는 않을까 하는 내적갈등(씨놉시스에서는 코끼리와의 사투)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은 엘리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찾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 아프리카에서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나게 될까?

 

연대하라

 

팽이의 네 번째 수록작품 주단한국문학2012년 여름호에 처음 발표되었다. 액자식 구성을 택하고 있는 이 소설은, 간헐적 기억상실증을 가지고 있는 주의 회상을 통해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가 살았던 유년기의 집은 다세대주택의 좁고 낡고 허름한 집이다. 이 집에는 주와 주의 쌍둥이 동생 단, 그리고 그들의 부모가 산다. 주는 건강했지만, 단은 학교에 다니지 못할 만큼 몸이 약했고, 하나뿐인 엄마의 관심은 늘 단을 향해 있었다. 이 시절, 단만 챙기는 부모를 바라보는 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둘 중 하나는 분명 너무 많이 가졌어. 사랑이나 건강이나 행운이나 행복이나, 모든 것을 한 그릇에 넣고 잘 섞어서 공평히 나눴어야 했는데, 신이 너무 게을러서 섞지도 않고 대충 나눈 거야. 이건 다 게으로고 무책임한 신 탓이지, 내 탓이 아니야. 내가 엄마 배 속에서 모두 뺏어 먹어서 그런 게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니지. (팽이, 103)

 

불평등의 이유로서 자신을 강한 부정, 신을 강하게 긍정하는 것이 오히려 주가 가진 죄책감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주는 자기와 똑같이 생겼지만 자랄수록 자기와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단을 볼 때마다 화가 났다. 불평등한 조건에서의 경쟁과 죄책감은 신을 은총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벌을 주는 존재로 규정하게 만든다. 작중 화자인 주를 작가의 사회적 가치관이 투영된 존재로 본다면, 주가 말하는 신은 우리 사회의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 곧 승자독식의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신자유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단이 상징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경쟁에서 도태된 모든 주변부 인생들일 것이다.

하지만 포스트IMF시대의 경쟁 상황을 신의 행위로 상징해버리면, 고통스러운 상황을 책임져야하는 누군가가 사라져버린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회를 만든 것은 이고 그것을 바꿀 힘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사회를 만들고 결국은 단(주변부 인생들)을 죽게 만든 것은 바로 인간이고, 인간이 만든 사회이다. 주단의 알레고리가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작품에서 주는 단에 대한 죄책감을 잊기 위해 기억상실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의 기억상실을 단의 입장에서는 자기의 역할에 대한 자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살아남은 경쟁자가 낙오한 자기의 손을 다시 잡아준다고 해서 결코 자기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와 경쟁자를 탓하기 전에 자기의 역할을 자각해야했던 단. 하지만 단이 자각을 넘어 행동을 하기위해서는 비장애인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의 힘이 필요했다. 단은 주에게 니가 책임지고 여자 하나 만들어줘. 좆나 예쁜 애로라며 억압적 탈승화의 과정을 보이면서 저항의 에너지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주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단을 떠난다. 단은 떠나는 주에게 자신이 죽으면 이름을 주단으로 바꿔달라고 말한다. 회상에서 돌아온 주와 아버지와의 통화에서 주가 떠난 그해에 단이 죽었음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억압된 것의 회귀가 죽음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어지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주의 회상으로 표현돼있다.

 

새 운동화를 신고 축구를 해서 골까지 넣었던 날, 주는 단의 잠꼬대 같은 소리를 듣는다. “나도 강력한 오른발 슈팅 같은 거 하고 싶어.” 주는 현관에 앉아 새 운동화를 신어보던 단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주는 현관으로 가 더러운 새 운동화와 축구공을 들고 왔다. 누워 있는 단의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운동화를 신겼다. 단의 두 다리를 움직여 강력한 오른발 슈팅을 할 때와 비슷한 포즈를 만들고, 단의 오른발 끝에 축구공을 놓았다. 두 손으로 단의 오른발을 잡은 주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 엄청난 돌파! 한명 제끼고, 두명 제끼고, ! 세명까지! 놀라운 드리블! 절호의 찬스!

단의 오른발을 살짝 들어올려 축구공을 톡 건드렸다.

슈웃!

데굴데굴 굴러가던 축구공이 검은 벽에 탁 부딪쳤다.

고올인!

주가 벌떡 일어나 겅중겅중 뛰며 엉덩이를 까불었다. 두 눈을 꼭 감은 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팽이, 120-121)

 

작품을 읽고 남은 가슴의 뻐근함은 노블레스오블리주의 모습, 연대에 대한 희망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주변부의 삶을 다르게 보는 중심부의 시선이 가능하다는 것을 작가는 주단을 통해 말하고 있다. 작가가 작품을 대부분 주의 입장으로 서술한 것은, 책 한권 편하게 읽는 것마저 사치스럽게 여겨지는 오늘날, ‘책을 읽을 수 있는독자들에게 연대에 대한 역할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가 심리적 와해를 숨김없이 드러낸 것도 독자와의 거리를 좁힘으로써 주의 마지막 행동에 복합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데에 한몫하고 있다. 낭만적 미화와 안일한 해결책이라는 클리쉐를 거부한 작가의 문장은 푼크툼이 되어, 승리를 바라는 우리 모두의 심장에 정확히 꽂힌다.

 

온전한 사람으로 거듭나기

 

우리는 부끄럽다. 경쟁사회에서 도태되어 부끄럽고, 길을 못 찾아 부끄럽고, 내 가족이 부끄럽다. 올곧게 앉은 자리에서 서고 싶지만, 주변의 시선이 무섭다.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일까? 질문은 나를 가장한 타인이 하고, 대답은 타인의 시선에 지배받는 내가 한다. 주체성을 잃은 인물들은 온전할 수 없다. 주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타자화시키고 나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이다. 생각하는 나와 생각의 대상이 되는 나 사이에 생성된 관계 속에 주체성이 있다.

 

난 절대 좋은 놈이 될 수 없다. 엄마는 나를 원망할까?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하겠지. 부모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나는 부모가 아니라서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 엄마 아닌, 다른 부모들의 보편적인 마음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다. 난 엄마가 나를 원망할 거라고 생각한다. 원망했으면 좋겠다. 원망해야 한다. 부모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 정말 그런 일을 안 겪어봤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다. 엄마는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니까, 그러니까 자꾸 절에서 절을 하는 거다. 그러다가 무릎까지 부서진 거다. (팽이, 142-143)

 

엘리의 나처럼 나 스스로에 대한 혐오는 내 안의 타인의 시선들의 권력을 크게 확장시킨다. 이러한 낮은 자존감과 주체성은 경쟁사회의 시민들이 겪는 우울증과 강박증, 불안감의 근본 요인일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는 자신의 평가에 달려있다. 온전한 사람으로 거듭나 밝은 세상을 바라보기. 우리 모두 아프리카로 가자.

 

우린 아프리카로 간다.

걸어왔다니까, 날 수도 있다니까, 믿어보기로 했다. 지금 내가 믿을 건 엘리뿐이다.(팽이,148)

Posted by 이탁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