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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26 우리반 일용이 서평

어두운 학교, 밝은 교실

 

최근 KBS의 드라마 <학교2013>이 충실한 현실 반영으로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얻었다. 학교 폭력, 학생들의 반항, 입시 위주 교육이 <학교2013>의 주요 소재였던 것을 비춰봤을 때, <학교2013>을 통해 최근의 어두운 학교 현실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청자들은 학생들의 반항과 일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교사 직함까지 내려놓고 학생들의 편에 섰던 정인재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하지만 이것이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느꼈던 시청자들도 많았다. 현실의 교육 문제는 교사 몇 명이 변화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의 소설가 루쉰은 희망은 마치 땅위에 길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애초에 땅에는 길이 없었지만,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드라마에서 나와, 현실을 바라보자. 주눅 들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학생들과, 그들의 재주를 믿고 따뜻한 눈길로 기다려주는 선생님들은 과연 우리 사회에 얼마나 존재할까? <우리 반 일용이>라는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가 만든 작은 책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교육에 아직은 희망의 길이 있는지, 일용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우리 반 일용이>는 교실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선생님들의 시각으로 그린 일기 모음집이다. 전체적으로 상처받은 아이들과, 이들을 지켜보는 선생님들의 감동이 이 책의 큰 줄기이다. 일기 속 대부분의 주인공 학생은 단순한 무관심의 차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기피와 혐오를 받는 존재이다.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거의 없거나, 있다 해도 크게 희망적인 것은 아니다. (김명길의 이 새끼 불량품이야에서의 승준, 정유철의 조디.에서의 조형준 등) 이러한 극도의 소외 안에 살고 있는 학생들은 마치 현실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현실에서는 주변부로 존재하는 학생들이, <우리 반 일용이>에서는 주인공이 되어 작품을 끌어가는 점이 참신하다. 대체로 학교에서는 교과 성적만이, 좋은 학생을 설정하는 유일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상석의 스승의 날 선물, 이정석의 지훈이등의 일기는 장애가 있는 학생도 얼마든지 선생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의 편견과 잣대가 장애학생을 억압했지만, 그들이 좋은 선생님과 친구를 만나면서 학생으로서의 삶을 되찾은 내용이다.

한편, 교육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들도 눈에 띈다. 김구민의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원종찬의 아침 교문에서등은 교사 역시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학생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내보인 일기들이었다. 책을 읽으며, 부모의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또 다른 폭력을 가하는 어른들의 각성과 변화도 필요해보였다. 김경해의 일용이, 이주영의 민희 이야기속의 학부모는 학생들의 온전한 생각과 느낌마저 파괴하고 있었다. 가정을 넘어 적나라하게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구자행의 백일장도 인상 깊었다.

마지막으로, 어른들보다 더 깊은 내면을 보여주는 학생들의 이야기는 많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윤태규의 아기를 업고 공부한 정임이, 김현숙의 포도 두 송이등은 학생들이 스스로 끝없이 자라고 뻗어 나갈 재주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 일기들이었다.

 

오늘의 교실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기회의 공간이 아니다. 어쩌면 학생들에게 교실은 생존을 위한 약육강식의 공간일 뿐이다. <우리 반 일용이>에 나오는 몇몇 학생들의 자폐적 의식을 지배하는 심리적 현상은 불안이나 부끄러움이며, 그것을 낳은 사회적 여건은 대부분 가난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책이 개인적인 차원의 비판 내지 감상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전히 교육문제를 의식하는 독자들에게 낯설게 하기의 충격만 주었을 뿐, 그 충격을 바탕으로 어떻게 교육이 변화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난과 편견의 희생자인 학생들이 비극에서 벗어나 다시 안정성을 회복한 점은, 저자들이 교실을 학생들의 자립적인 공간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교육계 차원에서도 교실의 일상을 소외 학생의 생활을 통해 본격적으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 반 일용이>는 교실의 세태를 다룬 일기만은 아니다. 저자들은 학생에 대한 서사적 접근과 아울러 서정적 자아를 통한 내면화도 시도했다. 황금성의 지금도 나를 가르치는 아이, 김광견의 성준이등에서 저자들은 학생들과 화해를 시도하고, 역으로 배우기도 하며, 서사와 서정이 조응하는 서술방식을 구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방식은 이미 머리글에서 예견된 바였다.

 

여기 교실 일기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세요. 놀랍게도 아이들은 저마다 제 힘으로 꿋꿋하게 살아갑니다. (중략) 이 아이들을 보면서 저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재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제 힘으로 살아가고 있지요. (중략) 그래서 아이들한테 배운다는 말을 하는구나, 그래서 지금도 나를 가르치는 아이란 말이 나왔구나 싶었어요. (p.6)

 

교육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교육은 모든 조건에서 독립된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제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들은 신뢰에 기초한 공적영역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우리 반 일용이> 속 교실의 대부분은 처음에는 사제 간의 소통이 더딘 어두운 공간이지만, 그 교실은 학생들의 순수와 선생님들의 사랑으로 아름답게 변한다. 이 아름다움은 교실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간직한, 슬프지만 정직한 아름다움이다. <우리 반 일용이>는 부끄러운 교실을 아름다운 서정의 힘으로 헤쳐나간 셈이다. 저자들이 이 희망의 원리를 치켜들고서 앞으로 세계와 어떻게 싸워나가 더 깊은 울림의 글들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나는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운 선생님, 아름다운 학생을 만난 것이 반갑다.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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