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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26 사라질 시간 사라진 시간

사라진 시간 사라질 시간

-최미아의 구조장비(대안공간 눈)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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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상대적이다. 지루한 수학 강의를 듣는 학생이 체감하는 시간과, 흥미진진한 SF영화를 보는 관객이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는 차이가 크다. 최미아의 구조장비에 입장했을 때, 필자의 시간은 비약적으로 느려졌다. 시간을 잃고 망연히 우주를 떠도는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시간을 낙후하게 만드는 전시에 힘을 불어넣어 줄 어떤 장비도 내겐 없었다.

416. 누군가는 세련된 백을 선물 받아 기뻤고, 누군가는 급하게 삼겹살을 먹다가 체했고, 누군가는 이사를 가서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모든 감정을 뒤로 한 채, 인생의 시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날 시간이 멈춘 아이들을 구해줄 장비는 너무 늦게 나타났다.

시간이 사라진 그들의 부모들이 거리로 나섰다. 부모들의 시간도 자녀들처럼 그날에 멈춰있다. 푸르게 자라던 나무는 검게 물들었고, 부모는 멍한 새처럼 죽은 나무를 바라볼 수밖에 없을 뿐이다.(black still life in, 2014) 왜 아이들은 죽어야만 했을까? 아이들을 구하려던 장비는 모두 사용할 수 없게 잘려 있었고(the true rescue equipment, 2009),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었다.

미국이 상징하는 자본주의는(pax americana) 우리가 효율, 이윤, 독점을 추구하도록 독려했고, 배려, 나눔, 안전 등의 가치는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의 심장은 미국적 자본주의로 새빨갛게 달아올랐고(pax americana), 이런 세태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는 학계로 한정돼 진행될 뿐이었다. 오히려 사건이 터지지 않고 시간이 평화롭게 흘렀다면, 더 이상하게 생각됐을 정도이다. 19941021일 잘린 다리 앞에서, 1995629일 무너진 건물 앞에서, 우리는 시간이 멈춘 이들을 처연히 목도해야 했다. 그로부터 스무 해가 지난 2014416일 진도의 고요했던 항구 에서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달라진 것은, 없다. 결국 스스로 각자도생하여 탈출하는 것 외에,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별다른 방법은 없지 않겠는가.(나에게 보내는 선물)

 

거울을 마주한다. 나르시스가 본 아름다운 자화상도, 동주가 만난 밉지만 그리운 자화상도, 미당의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말하는 추억을 덧 씹는 자화상도 아닌, 삽 모양의 거울에 부끄러운 내가 있다.

너는 뭘 했는데? 커피나 마시며 뉴스를 즐기던 네가, 무슨 자격으로 사회를 비판하는데? 부채감을 떨어뜨리려 촛불을 들었고, 이제는 그것마저 시들해지니 옷깃만 여민 채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는 너는 뭐가 그렇게 다른데?”

손잡이만 남은 각양각색의 삽들이 대안공간에 피었다. 싸늘한 가을을 맞은 이 삽들은 나와 당신이다. 화사한 태로 도시를 수놓는 손잡이는, 정작 사고 현장의 무거운 돌 하나도 들어내지 못하는 쭉정이일 뿐. 당신이 지금처럼 현실을 외면하면, 세상은 핏빛의 쭉정이들만 가득할 것이다.(빨간 안경,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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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사회적 역할, 참여, 저항 등의 대한 담론과 논쟁들이 촌스러워진 시대이다. 소위 소재’, 의제로 쉽게 창작하고 기획했다가는, 관객과 평단에게 문제를 그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했냐며 씹히기 십상이다. 이번 전시는 대안공간, ‘구조장비 등 현재 우리 사회의 주요 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안공간 눈의 전시가, 주요 미술관의 전시와 어떤 차별성을 갖고 있는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지방에, 골목에, 무료로 전시된다고 대안이라는 단어를 붙인 걸까? 캔버스 바깥의 예술이, 캔버스 안의 예술을 살린다. 관객은 전시도 보지만, 미술관도 본다. 골목을 걷다가 고개를 쭈뼛거리며 들른 관객이, 대안공간 눈이 추구하는 주안점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공간 운영의 묘가 있다면, 최미아의 구조장비들을 더욱 또렷하고 실감나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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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관람하고 나오며 원래의 시간을 찾은 필자가 늦은 밤 모니터 앞에 앉았다. 작가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구조장비는 무엇일지 안경을 벗고(빨간 안경, 2013), 생각해본다. 평안과 상상의 늪에 빠져 결코 구조되지 못할, 뒤틀리고 발칙한 시간이란 존재할까. 그런 시간은 황망해서 사라진 시간이 아닌, 즐거워서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시간이겠지. 먼 후일에 구조장비를 타고 그 시간, 오고야 말 것이다. 대안공간에서, 제주를 향하는 바닷길에서, 부모의 지친 발이 디디고 선 광장에서.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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