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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26 국가폭력과 인권 -영화 남영동1985

상처는 덮어두면 곪는다. 곪은 상처는 터지지 않으면 썩은 채 굳어버린다. 역사적 상처도 마찬가지다. 곪아터지지 않고 썩은 채 굳어버려 치유할 수 없는 내상이 되기 전에, 그 상처를 들추고자 한다. -정지영 감독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기억은 그래서 더욱 중요할 것이다. 기억은 때때로 강력한 투쟁이 될 수 있다. 남영동1985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야만적인 정치권력에 대한 기억의 영화다. 용서할 수 없는, 용서해선 안 되는 자들에 대한 기억의 영화이기도 하다.

군부독재시절처럼 사료가 남아있지 않은 시대 혹은 문헌 사료로 파악하기 어려운 문화, 정체성, 숨겨진 사실을 발굴하기 위해서, 본 영화처럼 자전적 수기와 구술사를 활용하는 것은 매우 적절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김근태를 비롯한 고문피해자들의 자기 역사 쓰기는 역사의 자기화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사회적인 것이자 정치적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침묵을 강요받던 이들이 정치적인 삶을 사는 데 필수적인, 성찰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앎을 활용하여 사회의 모순에 대해 건전한 비판과 저항 및 변화를 꾀함으로써 세상을 바로잡는 데 기여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비판적 또는 지성인적 지식인은 여러 사회에서나 오랜 역사과정에서 사회를 정화시키는 청량제 역할을 해오고 있다. 바로 민주주의자 김근태처럼 말이다.

영화로 들어가 보자. 군부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1985, 민주화운동가 김근태는 가족들과 목욕탕을 다녀오던 길에 경찰에 연행된다. 예전부터 자주 경찰에 호출되었던 터라 큰일은 없으리라 여겼던 그는 정체 모를 남자들의 손에 어딘가로 끌려간다. 눈이 가려진 채 도착한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 공안수사당국이 빨갱이를 축출해낸다는 명목으로 소위 공사를 하던 고문실이었다. 이날부터 김근태는 온갖 고문으로 좁고 어두운 시멘트 바닥을 뒹굴며 거짓 진술서를 강요받는다.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잔혹한 고문을 일삼는 수사관들에게 굽히지 않고 진술을 거부하는 김근태는 장의사라 불리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등장하면서 거짓된 진술을 하게 된다.

사전에서 고문은 '범죄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육체적으로 가학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나오는데 실제 영화에서는 고문이란 게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거짓 정보를 주고 그것을 자기가 했다고 강요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다. 특히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정치적 배경이 깔린 고문은 거짓정보를 만들기 위해서 거짓말을 강요하는 차원의 부조리함이 강했다.

영화 속 김근태에게 가해지는 고문은 물고문에서 시작하여 칠성판이라고 이름 붙여진 고문대 위에서 가해지는 전기고문으로 이어진다. 고문의 강도가 점점 높아질수록 나에게 전이되는 고통의 수치 역시 증가했다. 힘에 억압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의 한 장면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 질문했다. ‘나는 고문이 주는 공포심을 떨쳐내고 거짓 진술서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고문이 강해질수록 나는 신음을 토하면서 거짓 진술서를 써가는 김근태의 행동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면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고문의 강도가 증가하면서 김근태는 더욱 고통스러워하지만, 고문을 가하는 자들의 행동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그들에게 고문은 일상적인 업무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장이나 전무 같은 일반 회사의 직급 명칭들이 붙었을까? 애국심이란 핑계로 행해지는 고문 행위들. 그들은 전무의 자리에서, 또는 과장으로서 충실히 고문을 수행한다. 엔딩크레딧과 함께 나온 영상의 고문 피해자들 역시 그들에게 가해진 고문의 공포와 그 기억을 두고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입을 모았다. 그 정도로 고문은 끔찍했고 입에 담기 어려운 악몽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대공분실에서 라디오는 꽤 흥미롭고도 그로테스크한 장치로 보였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스포츠 중계는 그 당시 시대상을 증명하는 지표였다. 또한, 프로야구 중계를 듣는데 집착하는 강 과장의 모습이나 유명우 선수의 타이틀 매치라도 듣자고 화답하는 이근안의 모습에서 비일상적인 행위인 고문과 일상성의 행위인 라디오 청취가 뚜렷하게 대비됐다. 동시에 그 당시의 정권이 사람들의 관심사를 어떻게 돌려놓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라디오는 지금 우리가 그 시대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망각이 만들어낸 유산은 고작 프로야구 내지는 권투 정도이다.

영화 말미 고문을 통해 모든 거짓 진술을 받아낸 이근안은 김근태에게 "그럴 일 없겠지만, 세상이 바뀐다면 그때 날 찾아와 고문하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고 그들은 뒤바뀐 운명으로 재회한다. 무릎을 꿇고 김근태에게 사죄하는 이근안. 그렇지만 고문을 가하면서 이근안이 휘파람으로 불던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고문을 가하게끔 명령한 배후세력이 부는 휘파람은 대선을 앞두고 여전히 우리의 귓가에 들려오고 있다.

 

국가란 무엇이고 법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안정성을 이유로 한 법리는 일면 수긍할 수 있다 치더라도 폭력을 독점한 국가의 인권 유린행위는 어떻게 단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무릎 꿇은 이근안을 보며 느꼈던 것은 국가에 의한 고문은 피해자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가해자 자신의 존엄성과 나아가 인류 전체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87, 서울의 봄과 함께 서울의 고문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우리나라가 아직 고문에서 벗어났다고 보지 않는다. 피의자나 관련자들의 조사과정에서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가하는 모든 사소한 고통, 혹은 형이 확정된 사람들의 형 집행과정에서 일어나는 비인간적인 대우 등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넒은 의미의 고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까? 남영동1985가 남영동2012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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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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