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74일생]론 코빅이라는 실제 베트남 참전군인의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영화는 론을 통해 미국의 야만적인 역사와 함께 베트남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태어난 론은 애국심과 영웅심에 도취되어 베트남전에 해병대로 지원한다. 그는 베트남으로 파병되어 민간인을 학살하고, 자신의 부하를 실수로 죽인다. 그 역시 총상으로 인해 생사의 고통을 넘나들다가 하반신 마비가 되고 만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시위대를 보며 당황한다. 그가 사랑하던 도나도 자신의 신념과는 달리 시위에 참여하자, 그는 절망한다. 상실의 늪에서 그를 건져 올린 것은 자신이 죽인 부하 윌리엄에 대한 그의 사죄였다. 베트남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불면에 시달리던 론은 사죄를 통해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죄의식에서 벗어나자, 또다시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나오는 것을 막고자 반전운동에 참여한다.

이 영화를 보며 어떤 정치적 방향성도 없던 보통 사람이 어떻게 정치적 투사로 거듭나게 되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었다. 반전운동 속에서 론이 가졌던 기존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데모 학생들에 대해 발포명령 내리기를 서슴지 않는 위정자들의 도덕성에 회의를 느끼면서 그는 세상의 위선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전쟁이 발발했을 때, 가장 불쌍한 것은 힘없는 국민일 것이다. 헛된 명목으로 목숨을 걸고 참전해야 하고, 전후 적절한 보상을 받는 것도 어렵다. 베트남전과 마찬가지로 위의 영화 [더 리더]의 배경이 된 제2차 세계대전을 함께 생각해보자. 그 전쟁에서도 가장 많이 죽은 국민은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국민들이라고 한다.

제국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의 집중과 군부의 대두를 수반한다. 베트남전에서의 교훈은 망각한 채, 9·11테러를 계기로 미국의 국제관계는 무력으로 밀어붙이는 군국주의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현재 미국의 군사비는 전 세계 군사비의 약 40%에 달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 세계 38개국에서 725개의 군사기지를 보유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미국은 탐욕적인 제국이 아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진정 민주주의의 수호 국가일까? 이러한 질문 자체가 독립국가 베트남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을 영화는 증명하고 있다.

가스통 든 할아버지들, 당장 객석에 앉아 당신들이 사랑하는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두 눈 부릅뜨고 확인하세요!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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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만든 영화를 강의에서 만날 수 있어서 뜻 깊었다. 특히, 고등학교 때 봤던 [아버지의 깃발]과 함께 봐야하는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미국과 일본 양국의 입장에서 같은 사건을 파악할 수 있어서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고, 일본의 입장을 전달하려고 노력한 영화이지만, 미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태생적으로 미국인의 시각이라는 한계를 지녔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오지마 전투를 비롯한 전쟁은 수많은 개개인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러한 전쟁은 단지 위정자 몇 명의 승인만 있으면 시작될 수 있다. 나는 이 영화 속 개개인의 희생을 보며, 전쟁을 일으키는 소수권력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회의를 느꼈다. 제국의 부와 명예는 제국의 모두가 누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제국 안의 소수에게만 그러한 이윤이 집중될 뿐이다. 그 부를 위해 제국 안의 다수, 제국 밖의 모든 인류가 그들이 일으킨 불필요한 갈등(전쟁)의 희생양이 돼야 하는 것이다.

국가라는 미명 아래 짓밟히는 개개인들의 소중한 가치는 주인공 시미즈의 대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조국을 위해, 천황을 위해 나의 임무를 다하고 싶어. 하지만 개죽음은 당하기 싫어.” 자신의 목숨을 걸만큼 생애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 목표가 어처구니없게도 조국천황을 위한 것이라면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 아시아의 민중들을 짓밟는 조국, 죽음을 강요하는 천황이 어찌 생명을 희생할 만한 놀랍고 대단한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쩌면 조국이 제국이라는 것은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러한 제국을 곁에 둔 이웃나라 국민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특징과 문제들을 잘 집어냈다. 무기가 떨어진 일본군이 항복이 아닌 집단자살을 감행한 장면처럼, 기본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는 정부, 군부, 국민의 집단적 광기가 기반이었다. 이는 사무라이 정신, 천황에 대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충성 때문에 나타난 황당한 행동양식이다.

이 영화는 일제를 미화했다는 명목으로 국내에서는 개봉되지 못했지만, 세계 유수의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우리의 입장에서 다소 아쉽고, 안타까운 부분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아버지의 깃발]을 통해 미국의 입장을,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통해 일본의 입장을 전한다는 것은 역사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 심각한 편견을 불러올 수 있다. 양국의 희생자들이었던 필리핀, 한국, 중국 등의 입장도 영화 곳곳에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고래싸움에 터진 새우등을 위로하는 영화는 언제쯤 만들어질까?

영화 초반 강제징집 된 일본군이 작업하는 것으로 나오는 노동들은 실제로 대다수가 강제로 일본군에게 끌려온 조선인들에 의해서 실시되었다고 한다. 이 가혹한 강제 노역 중에 많은 조선인들이 죽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역을 견뎌낸 조선인들은 일본군이 되어 천황을 위해 미국과 싸워야하는 처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오지마 전투가 끝나고 약 40여명의 조선인 포로가 발견되었다.

이오지마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처럼 자신들이 신봉하는 천황과 조국을 위해 징집되어 온 일본군이 아니라, 그런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와 물과 식사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강간을 당하고, 노동하고, 전투에 참가해야 했던 조선인들이다. 실제로 일제는 조선뿐만이 아니라 중국 등에서도 만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때 함께 파시즘적 제국주의를 형성했던 독일, 이태리와는 달리 지금도 위정자들이 나서서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갖거나, 이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야스쿠니 신사를 유력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일 등일 것이다. 최근에는 오사카의 시장인 하시모토 도루가 성노예 강제동원과 관련해 피해자들의 증언은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면서 일본이 조직적으로 식민지 여성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한 증거가 없다는 발언을 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채, 집단 치매에 걸린 일본은 늙은 호랑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해야,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겪었던 설움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반일을, 일본은 혐한을 없애는 일은 진짜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일본은 경제를 넘어 인류애로도 선진국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조그만 섬에 갇혀 자위대로 자위하는 짓부터 그만두어라.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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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배포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 등의 유대인 중심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에게 행하는 무분별한 폭력과 범죄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유대인 학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반면에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위와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나치 추종자들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영화라 참신하고 흥미로웠다. 전쟁세대를 대표하는 여인과, 그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소년의 사랑이 이 영화의 주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36세의 여인과 15세 소년의 섹스, 그리고 전범자의 전범 시기 속에서의 사랑을 미화하고 있는 것이 다소 자극적이고 문제적으로 느껴졌다.

작품 속 36세의 여인 한나는 무지한 인물이다. 한나는 글자를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자, 전쟁에 세뇌당하여 사리 분별을 할 줄 모르는 까막눈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치주의자들은 한나 같은 평범한 국민을 상대로 선동정치를 계획적으로 조장하였고, 나치의 실력자였던 괴벨스는 정치에서 선동의 역할이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하고, 선동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나치의 선동은 공보부가 모든 미디어를 통해 주도하였다고 한다.

한나는 이와 같은 선동의 영향을 받아 살인을 방조하는 중죄를 지었지만, 영화 속에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한나를 단순한 죄인이라고 치부하기 보다는, 시대의 부조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보는 관점이 부분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나를 비롯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분명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며, 독일인을 넘어 인류 모두가 계속 상기해야 할 두려운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나치 중에는 한나처럼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행동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이유로 모든 나치의 하급 관리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비원을 포함한 나치에 복무했던 하급관리 거의 모두가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숨기려고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율과 규칙을 목숨처럼 여기는 한나는 이와 달리 당당하게 행동한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있으면 보통 사람은 부끄러워하지만, 한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위에서 시켰다는 분명하고 고지식한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할 때 정당한 이유가 있던 그녀는, 사회가 자신에게 부여한 죄를 하나도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의 상황에만 지나치게 몰입해 한나의 죄를 생각하는 것은,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게 되는 것 아닌가하는 상대적인 반감이 내 마음속에 동시에 들기도 했다. 실제로 영화는, 유대인학살은 단순히 무지한 결과이므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통렬히 반성하며, 가해자들에게 적당한 벌을 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한편, 한나가 나치전범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마이클은 혼란에 빠진다. 마이클은 한나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지만, 한나의 죄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나는 과거의 잘못된 이념 속에서 살던 사람이라면, 마이클의 현재의 달라진 사회를 사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마이클이 미래를 상징하는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는 장면이었다. 이처럼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관계 속에서 사회는 성장하고 발전한다. 최근 독일은 우리의 일베처럼 네오나치즘이 문제가 되고 있다. 네오나치즘은 나치즘의 현대판으로서 나치 독일과 나치즘의 부활을 추구하며 극우, 민족주의적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네오나치즘은 외국인노동자 등 타 인종에 대해 증오와 분노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달라진 시대 속에서, 마이클의 딸은 한나처럼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Posted by 이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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